"참된 스승·종교인, 지식의 전달자 아닌 삶의 안내자돼야"
80년 전 나라를 잃은 열 살 소년은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부모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소년은 '왕따'였다.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소년을 왕따에서 구해준 건 일본인 선생님이었다. 당시 6학년 담임 선생님은 소년을 따돌리고 때리는 일본인 아이들을 꾸짖었다. "이 학생은 일본어를 모르지만, 일본어가 필요없는 산수는 늘 백 점이다. 너희 중 이 아이만큼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있느냐?" 일본 아이들은 창피해 했다. 소년은 학교를 마치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고 한국 민주화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기며 '길 위의 신학자'라 불리게 된다. 그가 바로 박형규(89) 목사다.
◆나도 왕따를 경험했다…
-일본에서 초등학교 시절 집단 따돌림과 폭력을 경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적 고향에서는 천주교 신자셨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호주 선교사들이 창설한 학교에 다녔어요. 선교사들은 여타 조선 학교와 달리 조선어를 가르쳤지요.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어요. 하지만 집안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이 일본으로 이사하자 고난이 시작됐습니다. '일본어를 모르는 조센진'은 나쁜 꼬리표가 되어 왕따로 이어졌지요. 급우들은 수업이 끝나면 나를 놀리고 구타했어요. 처음에는 아이들이 욕을 하는데 알아듣지 못해 빙그레 웃는 게 다였어요. 나중에도 일본어를 몰라 항의조차 할 수 없었지요. 학교생활은 매일 전쟁이었습니다.
나는 왕따를 당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공부했어요. 성적이 올라가면 선생님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6학년이 되어서야 소원이 이루어졌어요. 다른 과목은 0점이었지만 산수만은 일본어를 몰라도 풀 수 있었기 때문에 늘 백 점이었는데, 선생님이 친구들 앞에서 그 점을 칭찬해준 것이지요. "형규는 산수는 늘 백점이다. 너희 중 그런 아이가 있느냐? 아직 일본어를 못 배워 다른 과목이 처질 뿐, 머리가 좋은 아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친구들의 왕따도 줄어들었지만, 덕분에 내가 감동해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때 그 스승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좋은 스승을 만난 덕도 있지만 그것을 계기로 열심히 살았다는 것도 위기를 극복한 원인이라는 얘기인가요?
=요즘 아이들은 너무 쉽게 포기하는 점이 아쉬워요. 내가 살았을 때와 비교하면 사회가 많이 안정돼 있고, 물질적으로 풍요한 상황에서 살고 있어요. 그런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다 보니 요즘 청소년들은 거기에만 안주하다가 정작 인생의 중요한 점을 잃고 사는 것이 아쉬워요.
특히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꿈과 이상을 빼앗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학교 성적에만 목을 맵니다. 애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못하지요. 학교 수업 마치면 과외에다 학원에다 애들이 새벽까지 눈을 비비며 지쳐 있어요. 언제 인생철학을, 인성교육을 배웁니까?
◆올바른 밥상머리 교육이 필요
-밥상머리 교육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부모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아이들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자신의 뜻대로만 키우려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여요. 아이들은 하나하나 다 인격입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먹고사는 게 힘들었지만 아이들은 모두 하나의 인격체로 대했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부모의 욕심 때문에 아이들은 하나의 물건 취급을 받아요. 답을 하나 정해놓고 돼지 몰듯 몰아가지요.
또 우리 사회가 긴장이 풀어지면서 아이들을 너무 오냐오냐 기르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너무 나약하다 보니 조금만 힘들어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요.
올바른 밥상머리 교육이 필요해요. 예전 가정은 아이들에게 위안과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는데 지금의 가정은 오히려 핍박받는 곳으로 변했어요.
-성적 지상주의에 너무 몰두한다는 말인데, 공부 안 하면 어떻게 사회에 나가서 살겠느냐 고민하는 부모도 많아요.
▷그게 욕심인 것 같아요. 전 아이 넷을 키웠어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얘긴 안 했어요. 가치관만 정립시켜주면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겁니다.
-요즘 부모가 욕심이 많다는 얘기인가요.
▷자기의 능력, 취향에 따라 자기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후원자의 역할만 하면 돼요. 정답을 정해놓고 그것을 강요하면 아이들의 반발만 가져오게 되고 가정의 평화는 금이 가지요. 어느 정도 연령까지는 부모가 결정하겠지만 주체성이 생길 나이가 되면 아이들이 선택한 것을 밀어주고 후원하는 것이 좋은 부모상입니다.
-가정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학교와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부모도 문제지만 학교와 사회도 공동 책임이 있어요. 아이를 길러내는 모습에서 예전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어요. 첫째로 교육기관에서 인성교육이 하나도 안 된다는 얘깁니다. 선생들도 공무원들도 아이들을 성적이라는 잣대로만 줄을 세워요. 고교 2학년만 돼도 체육 시간이 없다고 들었어요. 아이들이 젊음을 폭발시킬 수 있는 교육의 장이 하나도 없어요. 공부의 압박감과 부모와 선생의 기대치를 채우려는 이중성에 고립돼 우왕좌왕하게 되지요.
다른 친구들은 앞서가는데 경쟁사회에서 함께하지 못하고 뒤처지니까 지식 안 되고 가정형편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폭력이 앞서게 됩니다. 나도 초등학교와 중학교 선생을 해봐서 아이들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국가도 물질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면 더욱더 인성과 도덕적인 교육이 중심이 되는 시스템을 정책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외국에도 학업 스트레스는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을 배출하거나 해소하는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잖아요?
◆삶의 길을 이끌어줄 사람은 참된 스승과 종교인
-15일은 스승의 날입니다. 스승의 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가 많아요.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땐 선생님은 독립운동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시대상황이 그랬으려니라며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신 겁니다.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삶을 가르쳐주고 애국이 진정으로 뭔지, 나라에 대한 국가관을 가장 먼저 심어주셨어요.
삶의 안내자가 아닌 지식의 전달자로 전락한 요즘 스승의 모습, 어떤가요. 요즘 선생님들의 사명이 조금 흐려진 게 아닌가 싶어요. 나도 예전 초'중학교 선생을 했어요. 옛날엔 스승을 사표(師表)라고 했어요. 학생들에게 진정 존경과 모범을 받을 수 있는 참된 스승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건강한 생명윤리에 종교인들의 역할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종교인들은 많은데 생명문화가 강물처럼 넘치지는 않습니다. 교계 책임자들의 문제가 아닐까요.
▷법정 스님 같은 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무소유의 철학을 실천하는 스님이 얼마나 될까요. 기독교도 참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목사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어요. 요즘 교회는 너무 세속적으로 변하고 기업화하고 있습니다. 교회나 사찰이나 종교가 자기 자신의 성장이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 고쳐야할 것들을 지적하고 솔선수범하는 곳이 종교입니다. 종교 자신이 비대해지는 순간 망하게 돼있어요. 교인으로 하여금 정말 참된 신앙을 가진 예수님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사회적 모순에 대해 바른말을 해야 합니다. 그게 교회가 할 일이지요.
물질만능주의 사회가 점점 만연할수록 생명윤리는 땅에 떨어지고 폭력이 판을 칩니다. 건강한 생명윤리가 숨 쉬는 사회를 위해 교계가 더 이상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대담 : 이창영 매일신문발행인
사진 :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정리 :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박형규 목사는
그냥 원로라는 말로 박형규 목사를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이제 한발 물러서 서재에 머물러도 될 연륜이지만 여전히 왕성한 현장가라서다. 1923년 태어났으니 올해 졸수(卒壽)를 앞둔 박 목사는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민주화운동에 몸담아 영혼을 살랐던 '길 위의 신학자',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통하며 은퇴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박 목사의 이름을 빼놓으면 퍼즐이 맞춰지지 않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된 것도 있지만 지난달 30일엔 기독교계에서 한국사회 민주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성공회대 첫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다.
사회 부조리나 부정부패 등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평범한 목회활동을 이어가고 있던 30대 후반의 박 목사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은 4'19 혁명일이었다. 때마침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 궁정동에서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던 길에 총소리와 함께 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들것에 실린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선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한국 교회가 죽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인생의 모토가 된 세계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이 불현듯 떠올라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해야 한다'는 숙제를 스스로 짊어졌다. 한평생 길 위에서 실천하는 신앙을 펼치는 그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박 목사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여섯 차례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박 목사는 부산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1959년 동경신학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3년 미국 유니언 신학대를 수료했다. 이후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 공덕교회에서 목회를 했고 1971년부터 1992년까지 서울 제일교회 목회 활동을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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