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서 피난 부모님 정착한 대가야의 안락한 품
어릴 적 어느 봄날, 참꽃이 집 뒤뜰까지 내려왔다. 연분홍 꽃잎이 아름답고, 달짝지근한 맛에 끌려 더 멀리 있는 꽃이 함빡 피어 보여 조금 더 조금 더 멀리 다니다 길을 잃고 무서워 울며 주저앉았던 곳. 엄마가 찾아와 손 내밀던 곳. 지천에 진달래꽃이었던 그곳에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다. 산소 잔디에 앉아 앞을 내려다보니 하얀 꽃잎 꽃가루 흰 눈처럼 봄바람에 흩날린다. 아련히 바라보이는 구불구불한 길 돌아올라 고령에서도 가장 높은 의봉산자락 앞에 작은 동산으로 가려진 고동 굴속 같은 숨겨진 산골 마을.
나의 고향은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신간2리(물한리)이다.
고령은 대가야국의 도읍지이자 문화유산이 많아 주산 왕릉, 가야토기, 가야금의 우륵이 탄생한 가야골 등 가는 곳 마다 문화유산 답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대가야국에 터를 잡은 운수는 구름과 물을 상징하고 그중에서 우리 마을은 물한리이다. 6'25전쟁 중에 공산당이 찾지도 못하는 이곳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달랑 보따리 하나 들고 들어섰다. 아버지는 황해도 황주에서 어머니는 평안도 운산에서, 고약한 공산당이 들어서고 김일성의 토지몰수정책에 땅 잃고, 가족 잃고, 목숨을 운명에 맡기고 이별의 삭풍 불어닥친 흥남부두 지나 남으로 남으로 밀려와 여기까지 피란을 왔다. 그래도 숨어 있는 그 골짜기에 삼십여 가구 이상이 대숲 돌담길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단다. 하여튼 아버지 어머니는 마음씨 좋은 운권이네 집에 작은 빈방 하나 빌려 밥그릇 두 개, 숟가락 두 개로 살림을 시작했다.
송기죽과 산나물로 연명하던 1953년 2월 초하루, 오전 10시쯤 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산골마을을 울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향 동네는 높은 산 중턱이라 산신령을 엄중히 믿고 매년 정월 초이튿날에는 찬물에 목욕하고, 송아지를 잡아 산지(산제사)를 엄격하게 지내고 있었다. 동네 입구 붉은 소나무 용틀임하는 성황당에서는 소고기를 정확하게 나누어 새끼줄에 구멍을 뚫어 끼워 껍질까지도 나누어 얹어주었다.
그날은 일 년 중 유일하게 소고깃국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그날은 집 앞 골목골목마다 삽으로 황토를 양옆으로 떠 놓고 그 위에 청솔가지를 꺾어 올려놓았다. 잡귀를 물리치는 정성이었다. 또 2월 초하루는 무시무시한 영등할매 바람 올리는 날이란다. 영등할매는 정말 산신령보다 더 무서웠단다. 집집마다 정화수 떠놓고 두 손 싹싹 빌며, 정성을 올리던 중에 세상에 터진 나의 울음소리가 영등할매의 영험이라 믿고 경사라고 동네가 시끌시끌하였단다.
하여튼 나는 영등할매의 바람을 타고 밤 뻐꾸기 구슬피 울어대는 달 뜨는 두메산골에 등장하였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우리 집과 십여 가구는 지금 사는 들마을로 작지만 새집을 지어 이사를 내려왔다. 그즈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버님 어머님들의 사랑으로 태어난 1953년생 우리는 가슴에 손수건 명찰을 달고 1934년 10월 20일 개교한 유서 깊은 운수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1, 2반에 120명 정도가 됐다. 종남이, 태분이, 춘자, 대성이 등등. 다들 잘 있겠지?
시골집에서 비포장 흙먼지가 뽀얗게 나는 가로수가 있는 신작로 십리를 용희, 윤덕이, 종운이, 순자, 순년이, 수조, 윗동네 풋돌이, 종진이 등과 함께 걷고 놀고 뛰며 다녔다. 우리는 책 보자기에 도시락을 같이 싸서 어깨에 비스듬히 메고 다녔는데, 갈 때는 소리가 없지만 올 때는 도시락 소리가 딸그락딸그락 났다. 긴 막대기에다 책 보따리를 다 끼우고 가위바위보 해서 두 사람이 앞뒤에서 잡고 정지나무까지 구간을 정하고 이긴 친구는 이골 저골 골짜기에 하얀 찔레꽃, 연분홍 참꽃 따먹으며 깔깔거리며 집으로 다녔다.
여름에는 길 가 개울에 송사리떼 피리떼 쫓아다니며 놀고, 가을에는 콩사리, 밀사리. 입이 새까맣게 될 때까지 먹었다. 겨울에는 모듬밥(각자 쌀을 한 종지씩 가져와 한집에서 모여 동네누나들과 함께 밥을 해먹었다) 때문에 우리 마당에 묻어 둔 독김치는 도둑을 많이 맞았다. 우리 어머니의 손맛 이북김치맛이 좋았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는 신작로를 가운데 두고 우물이 있고 양쪽으로 집들이 있었다. 방과 후나 노는 날이면 신작로 길은 놀이마당이었다.(차는 하루에 한 번 올라가고 한 번 내려가면 끝이었기에….) 가이생, 자치기, 옥따기, 딱지치기… 하루 해는 너무 짧았다. 학교 가는 길 중간쯤 연못가에 빵집이 하나 있었는데 풀빵부터 '찹쌀모찌'까지 있었다. 우리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외상으로 먹기 시작했고, 빵값이 자꾸 밀리는 바람에 그 집 앞을 다니지 못하고 집 뒤 산으로 둘러 다니다가 산에 나무로 집을 지어 용희와 누구는 거기서 반 독학을 했다. 한글은 6학년 졸업하고 배호의 두메산골 노래 배우면서 알았고, 구구단은 살아가면서 터득했다. 그래도 지금은 어엿이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 훌륭한 가정을 이루고 말이다. 빵값은 일 년에 한 번씩 보리쌀로 갚았다.
어느 날은 고령장날이었다. 고령장은 오일장으로 우리 집에서 이십 리, 운수학교에서도 십 리를 더 가야 한다. 고령 장은 보부상 상단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는 장날에 운 좋으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덜컹거리는 소달구지를 타는 행운도 있었다. 봉구 아버지가 장날이면 소달구지를 몰고 동네 장을 보러 다니셨다. 쌀과 콩 등 곡식을 내다 팔고 괭이, 낫, 닭이나 강아지, 꽁치, 갈치 등등 모든 장심부름을 하셨다. 그날은 어쨌든 묘령의 여인이 달구지를 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혹시 여인장을 보신 건가? 크크크…. 우리가 책보라도 실으려고 하면 이놈들~! 하고 소 회초리 휘두르며 소리치셨다. 그날 우리의 호사는 허사였다.
신작로 길에 덜컹거리는 버스가 하얀 흙먼지를 날리며 내려오면 우리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흰 두루마기에 큰 갓을 쓰고 버스 앞에서 큰절을 올렸기에 장날 만원이라도 우리 마을에서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차장 누나의 기분에 따라 우리는 공짜 차를 타는 행운도 있었다.
또다시 세월은 흘러 서걱대는 가을 새벽길을 아버지는 앞에서 걷고 나는 조금 뒤에서 따라 걷고 있었다. 이 길이 대가야로 유학 가는 첫 길이자, 내 인생의 꿈을 찾아 항해하는 길이었다. 그날 안개 속에서 피어난 빨간 자줏빛, 하얀 코스모스, 이슬을 머금은 그 꽃잎꽃잎들….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영원으로 녹아있다. 헛기침하며 뒷짐 지고 걸으셨던 아버지의 뒷모습도 함께.
술이 거나하게 취하시는 날은 '다 필요 없다. 고향으로 갈란다' 하시던 아버지는 그렇게 그리워 가고 싶어 하셨던 고향을 가지 못하셨다. 돌아가신 2년 후에 적십자사에 신청했던 고향 초대장을 받았지만 유효기간이 지난 초대장이었다. 어머니의 애환과 한 많은 세월은 몇 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만큼 굽이굽이 돌아온 삶이었다.
어머니의 새끼손가락은 끝이 휘어 있다. 내 어릴 때 나를 업고 디딜방아를 찧고 있었는데 그만 등에서 쉬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손가락이 찍혀 병원도 멀고 교통이 불편하여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그 고통을 참고 있다 자연 치유되느 바람에 그리되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머니는 한도 신명도 많으시다. 작년 설날에는 동생들 가족들과 다 모여 방안에 화롯불을 피워놓고, 설주 한 잔 하면서 어머니의 애수의 소야곡, 목포의 눈물 등 한 서린 구슬픈 노래를 듣고 들었다.
어머니가 지금도 계시기에 너무나 행복하다. 고향 가는 길 구불구불 이릿재 넘어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다랑논들의 평온한 산하 풍경이 신이 내린 땅처럼 가득 나를 안아 들인다. 지금 동원화랑이 그림과 함께 굽이굽이 돌아 30년을 지나 새로운 30년을 향할 수 있는 에너지는 어린 유년시절 장대를 들면 닿을 듯한 둥근 달이 뜨는 두메산골 고향의 추억이 녹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손동환 동원화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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