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 여니 해삼은 형체도 없고 냄새만 '폴폴'
나는 엉뚱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다. 대학 다닐 땐 책 살 돈이 없어 빈 가방에 도시락만 넣고 다녔다. 영문학과를 다녔는데 영어책이 없었으니 공부는 하나 마나였다. 3학년 땐 어머니께 무슨 거짓말로 둘러댔는지 기타를 사서 '라 파로마'를 퉁기고 다녔다. 그것 또한 스승을 만나지 못한데다 재능이 모자라 경지에 오르지 못하고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나는 열차 통학생이었다. 고교 땐 선생님이 인정해 주는 단골 지각생이었다. 그때 열차는 제 시각에 맞춰 운행되지 않았다. 배운 것도 다 모르는데 안 배운 것을 알 턱이 없었다. 공부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그래도 별로 답답해하지 않았다. 천성 탓이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에 들어갔다. 공부보다 산행을 더 열심히 했다. 주말은 팔공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2학년으로 올라가자 하계 산행이 지리산 종주로 결정됐다. 그런데 경비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교회에 간 사이 쌀독의 쌀을 퍼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출발 당일 아침에 어머니의 빗자루가 거꾸로 서서 춤을 추었다. 무거운 륙색을 짊어지고 냅다 뛰었다. "다시는 집에 들어오지 마라." 어머니의 패악에 가까운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나는 마냥 즐거웠다.
그러다가 다른 바람이 들었다. 말이 타고 싶었다. 교양학부 북쪽에 있는 마장에 자주 드나들었더니 하루는 마음씨 좋은 목부가 공짜로 말을 태워 주었다. 꿈에서도 말이 어른거렸다. 버스비도 없는 주제에 양키시장 중고 신발가게에서 박차가 달린 승마화를 거금 70환을 주고 샀다. 박차를 책가방 속에 넣고 다니니까 걸어다녀도 말 탄 것처럼 신이 났다. 우쭐우쭐. 그 박차는 지금도 서가 한쪽 구석에서 말의 배때기를 찌를 날을 기다리고 있다.
마음에 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바다였다. 바닷가에 촌집 한 채를 사고 싶었다. 20만원짜리 적금을 해약하여 무작정 바다로 달려갔다. 동해의 월포라는 포구였다. 몇 개월을 나다닌 끝에 30만원을 주고 삼 칸 초옥 한 채를 매입했다. 당장 살 집이 아니어서 빈집으로 버려두었다. 그랬더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가족과 함께 휴가를 월포에서 보내기로 했다. 내 집 마당에 텐트를 치고 첫 입주식을 치렀다. 아내와 아이들이 "뭐 이런 데서 자는 거야" 하고 투덜댔다. 그래도 나는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대저택의 주인이나 된 듯 무척 기뻤다. "내일 점심은 방파제에 나가 조개를 잡아 멋진 코펠 밥을 지어 주겠다"는 약속으로 얼버무렸다. 너덜거리는 부엌문이 서핑 보드로 쓸 수 있을 것 같아 그걸 떼어내 바다로 들고 나갔다. 두 쪽짜리 송판을 바다 위에 띄워 두고 멋진 폼으로 올라탔으나 부력이 약해 물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아이들이 웃자 아내도 따라 웃었다. 그 웃음 속엔 '바보, 돈키호테!'란 뜻이 숨어 있었다.
서핑 보드를 밥상으로 대신하고 해삼이나 몇 마리 건져볼 요량으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방파제 부근은 수온이 높아 아무것도 없었다. 가까운 해녀 집을 찾아가 해삼 3천원어치를 샀더니 우리 식구가 먹고 남을 만치 많이 주었다. 급하게 설쳐대는 아이들에게 한 접시 썰어주고 나머지로 밥을 지었다. 뜸을 들여 뚜껑을 열어보니 해삼은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밥에는 해삼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알고 보니 너무 일찍 해삼을 넣은 탓에 열기에 녹아 형체가 없어진 것이다.
여태 살아오면서 한 번도 멘토를 만나지 못했다. 모든 걸 스스로 깨우치는 독학으로 일관해 왔다. 지름길을 알지 못했으므로 성취하고 도달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동안 목표보다는 과정에 더 많은 재미를 느껴왔기 때문이다. 해삼 밥도 혼자 서너 번 실습하고 나서야 해삼이 사라진 이유를 알았다. 해삼 밥은 뜸을 들인 후 썬 해삼을 넣고 비벼야 줄어들지 않는다. 해삼 밥은 정말로 맛있는 음식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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