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소녀를 사랑한 노시인의 이야기
영화 개봉을 앞두고 화제가 되고 있는 박범신의 소설 '은교'를 읽었다. '은교'는 일흔이 된 노시인의 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회고이자 한 소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다.
"고요하고 쓸쓸하다는 뜻이 있는 적요라는 이름은 물론 필명이다. 그는 이십 대 때 사회주의운동에 투신, 폭풍 같은 혁명의 전사가 되길 꿈꾸었고, 삼십 대 십 년은 감옥에 있었으며, 사십 대에서 일흔 살로 죽을 때까지는 시인의 이름으로 살았다."
살아생전의 그는 열두 권의 시집을 냈으며, 내는 시집마다 전문가는 물론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시집 이외엔 저서가 전무했다. 단 한 편의 산문을 쓴 적도 없었고, 공식적인 인터뷰를 한 일도 없었다. 하지만 시에 담긴 그의 발언은 언제나 시대를 견인하는 경이로운 힘을 발휘했다.
그의 문우이자 변호사인 Q는 시인의 일주기를 맞이해, 자신이 남긴 노트를 세상에 공개하라고 한 시인의 유언을 집행하려고 노트를 읽는다. 그런데 그 노트에는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노트에는 열일곱 살 소녀 은교를 사랑하였고, 제자인 서지우가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세 권의 소설은 모두 시인 자신이 쓴 것이며, 자신이 서지우를 죽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런저런 기념사업과 시인의 기념관 설립을 추진 중인 Q변호사는 유언의 집행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진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너무나 다른 이적요 시인의 놀라운 사생활을 공개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고민이다.
한편 은교는 서지우의 노트를 보관하고 있었기에, 소설은 Q변호사의 시점으로 현재를, 시인과 서지우의 일기를 통해 과거에 있었던 일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세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과 예술가로서 시인의 고뇌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나의 머리는 반백이 되고/ 나의 배는 복통처럼 불러지고/ 나의 기침은 그칠 새 없다/ 이제는 이제는 이제는/ 젊었을 때는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참말로/ 해를 쪼이고 있는 도마뱀처럼/ 나의 발가락이 물가에서/ 갈색이 되어가는 것을 쳐다보며/ 나의 발이/ 그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걸 바라보았었다/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서."
J.프레베르의 '늙는다'라는 시에서 묘사된 대로 나날이 시들어가는 자신의 육체를 서글프게 바라보는 노시인에게 은교는 찬란한 생명의 환희이다.
"그애는 몸이 가볍다. 그애는 마치 어린 새가 쫑, 쫑, 쫑, 걷듯이 날렵하게 걷는다. 질끈 묶은 그애의 머릿단도 쫑쫑쫑, 경쾌하게 내게로 다가든다."
노시인이 홀로 사는 그 집에 은교는 마치 하나의 움직이는 '등롱'처럼 들어왔다.
"내 자의식에 인화된 사진 속 나의 집은 그애를 만나기 전까지 오로지 우중충한 무채색의 어둠에 싸여 있었다. 에드거 앨런 포의 허물어져가는 '어셔 가' 저택처럼. 그애가 들어오고, 비로소 내 집에 초롱이 켜졌다. 가을이 깊을 때까진 말 그대로 그애는 다만 꽃초롱, 혹은 등롱이었다."
은교를 둘러싸고 벌이는 시인과 서지우의 갈등에 대해 은교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은교가 보기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을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긴 서지우는 일기에 늘 '나의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이라고 쓴다.
젊음과 나이듦, 노년의 욕망과 한 시인의 자기 부정, 스승을 뛰어넘고자 하지만 뛰어넘지 못하는 제자의 고뇌와 사제지간의 애증과 질투 등 이 소설은 여러 흥미로운 요소들을 두루 담고 있다.
작가는 그의 이전 작품인 '촐라체'와 '고산자', 그리고 '은교'를 '갈망의 삼부작'이라고 밝힌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서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작가의 지치지 않는 창작열이 이적요 시인의 그것처럼 아름답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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