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년 기와·초가집 370채…세계도 놀란 '삶터 박물관'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풍산 류씨가 600여 년 동안 살아오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동성마을이다. 160여 채의 기와집과 210여 채의 초가집이 끊어질 듯 연결되는 길과 돌담으로 어울리고 있다. S자 모양으로 마을을 휘감아 도는 푸른 낙동강 물줄기는 한마디로 평화로움과 풍요로움이다. 예로부터 충절과 학문을 중시했던 사람들이 살아오고 있다. 특히 이 마을에는 '더불어 함께 살았던' '욕심내지 않고 베풀면서 살았던' 선조들의 지혜가 고택과 길섶 곳곳에서 묻어나 전해오고 있다. 하회마을은 천년 세월을 옛 모습 고스란히 전해지는 야외 박물관이다. 이곳으로 발을 들여 놓으면 수백 년을 거슬러 역사 기행길에 나서게 된다.
◆하회마을의 큰 집, 대종가 양진당
양진당(養眞堂'보물 306호)은 겸암 류운용(1539~1601) 선생의 집으로, 풍산류씨의 대종가다. 겸암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1515~1573)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으로도 불린다. 이 마을에서는 흔치 않은 남향이다. 마을의 가옥들은 대체로 삼신당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탓에 집들의 좌향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양진당'이라는 당호 현판은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썼다.
집은 전형적인 口자형으로 지어졌다. 口자형 안채에 사랑채와 대청마루가 一자형으로 이어져 있다. 사랑채는 고려 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조선조 건축양식으로, 건축양식이 공존하는 하회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웅장하고도 높다란 사랑채와 대청마루가 압도한다. 이곳에서는 문중 행사나 제사를 치르면서 많은 손님이 찾아 여느 고택과 달리 대청마루가 크다.
사랑채와 대청마루 오른쪽으로 사당이 있다. 특이한 것은 사당이 두 채다. 큰 사당은 입암고택 당호의 주인공인 입암을, 작은 사당은 겸암의 불천위를 모셔두고 있다. 부자를 한 곳에 모시지 않기 때문이다.
사당 담장 너머로는 하회마을의 지킴이 나무인 신목(神木)과 삼신당이 보인다. 마을의 모든 집들은 이 삼신당을 중심으로 들어서 있다.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 공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 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해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 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이준용 경북도문화관광해설사는 "여느 종갓집과 달리 양진당에는 사당이 두 곳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위패를 한집에 모실 수 없기 때문이다"며 "양진당은 하회마을의 대종가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했다.
◆조선 5대 명재상 서애 종택 충효당
충효당(忠孝堂'보물 414호)은 임진란이 발발했던 1592년 영의정으로 조선 5대 명재상으로 이름 높은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종택이다. 하지만 서애 선생은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에 완공됐다.
충효당은 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인 졸재 원지공을 도와서 지었다. 증손자 의하공이 확장한 조선 중엽의 전형적인 사대부 집으로서 대문간채'사랑채'안채'사당으로 52칸이 남아 있다.
충효당 입구에 길게 지어진 행랑채가 이채롭다. 대부분 양반집 행랑채는 4~6칸이지만 충효당 행랑채는 12칸이다. 서애의 8대손 일우 류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 받아 부모님 수발 등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 왔을 때 호위했던 군사와 병장고, 식량창고 목적으로 급하게 지어졌다고 한다. 이 행랑채는 '병조아문'(兵曹衙門)으로 별칭되고 있다.
서애는 만년에 '나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임금과 어버이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것, 둘째는 벼슬이 지나치게 높았으나 속히 관직에서 물러나지 못한 것, 셋째는 도를 배우겠다는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이다.
서애는 이 가운데 충효를 실천하지 못했음을 첫째로 꼽았으며 이 때문에 '충효'는 서애 가문의 대표적 표지였다. 서애의 유훈을 받든 자손들은 종가를 '충효당'이라고 이름 짓고 이곳을 충효당 종가라고 불렀다.
충효당 주인인 서애 14대 류영하 종손은 "탐방객들이 고택의 겉모습만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서애 선생을 비롯한 고택에 숨은 역사적 인물들의 발자취와 문화'역사적 향기 등을 제대로 느끼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충효당 안채 내당을 오르는 마루에는 1999년 4월 21일 하회마을을 찾은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충효당을 찾았을때 신발을 벗고 디딤용으로 설치했던 가로, 세로 50cm 크기의 간이 마루가 보존돼 있는 게 눈에 띈다.
◆조선시대 여행으로 초대하는 북촌댁
하회마을 북쪽 중앙에 자리한 북촌댁(중요민속자료 84호)은 문화체육관광부의 고택명품화 시범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생활과 체험관광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변신한 옛 집이다. 이 집에서 하룻밤은 수백 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 조선시대로의 여행을 가능케 하고 있다.
1882년부터 경상도사를 역임한 풍산 류씨 석호 류도성공이 증축한 건물로, 215년 동안 선비가 살았던 사대부 한옥으로 유명한 집이다. 안채와 큰사랑 북촌유거(北村幽居), 중사랑 화경당(和敬堂), 작은사랑 수신와(須愼窩) 등 72칸에 이르는 큰 한옥이다. 뒤편 주춧돌만 남아있는 안채후원 별당 27칸이 복원될 경우 완벽한 99칸 양반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주인 유세호 씨는 옛 집에 고가구와 전통침구를 갖췄다. 2007년부터 먹고'입고'자며 한옥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전통 구들장 온돌방에서 잠을 자고 놋그릇에 시골 한식 12첩 반상으로 조선시대의 삶을 느끼도록 했다.
큰 사랑채인 '북촌유거'에 들어서면 3면에서 하회를 둘러싼 자연풍광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화산, 북쪽에는 부용대와 낙동강, 남쪽으로는 남산과 병산을 볼 수 있다. 북쪽 문을 열면 뒤뜰에 특이한 소나무 한그루가 눈에 띈다. 나무 몸통 모습이 마치 하회마을의 지형처럼 S자형으로 자라나 '하회송'(河回松)이라 불린다.
이 집에는 며느리방 문의 미닫이 창문이 'ㄹ'자형으로 꾸며져 하인들이 문틈으로 방을 엿보지 못하게 만든 지혜가 스며 있다. 화재를 막기 위해 찹쌀풀과 해초, 흙을 혼합해 만든 과학적인 벽체 역시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 같은 화려한 외형보다 더 값진 교훈을 간직하고 있다. 북촌댁에는 행랑채가 없다. 행랑채에 기거해야 할 노비들을 밖에 살도록 배려해 준 것. 소작료도 절반만 받았다. 흉년이 들면 소작인들의 부담을 줄여 덜 받았다.
이 집에는 99칸 가운데 2칸만은 초막이다. 자손들이 행여나 게을러지지 않을까를 염려해 초막 2칸의 모자람을 물려준 것.
북촌댁 주인 유세호 씨는 "한옥은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져 습기에 약해 사람이 살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내려앉는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는 난방 방식이 한옥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특히 "선조들의 학문, 북촌유거에 전해오는 자연과 조화로움, 언제나 베풀면서 살았던 베풂을 이곳에서 숙박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다"고 했다.
◆옥연'겸암정사 잇는 '층길'에 스민 형제애
하회마을 만송정에서 바라보면 부용대 절벽 왼쪽에 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89호), 오른쪽에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88호)가 자리 잡고 있다.
겸암정사는 명종 22년(1567) 봄 겸암 선생이 건립해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던 장소다. 옥연정사는 선조 19년(1586)에 서애 선생이 세운 것으로, 임진왜란 직후 향리로 은퇴한 선생께서 '징비록'을 구상하고 지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선생은 당초 이 정자를 짓고자 했으나 재력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탄흔이란 승려가 10여 년 동안 곡식과 포목을 시주해 완공할 수 있었다.
부용대 절벽 중간에는 옥연'겸암정사를 잇는 좁다란 길이 있다. 일명 '층길'이다. 층길은 '형제의 길'이라 할 만하다. 옥연정사에 기거하던 서애 선생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바로 겸암정사에 머물던 형, 겸암을 만나기 위해서다.
조선 후기 하회마을의 모습을 담은 산수화인 '1828년 하회마을'이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됐으며 이 지도에 층길이 사실적으로 나타나면서 비로소 이 길의 내력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겸암정사 앞에는 '겸암사'라는 시 한편이 새겨져 있다.
'내 형님 정자 지어 겸암이라 이름 지었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내리고 매화는 뜰 가득 피었구나. 발끝엔 향그러운 풀냄새 모이고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그리움 눈물 되어 소리없이 내리고 강물도 소리 내며 밤새 흐르네.'
◆하회마을 고택들
하동고택(중요민속자료 177호)은 서애파로 용궁현감을 지낸 류교목 공이 현종 2년에 창건했다. 하회남촌댁(중요민속자료 90호)은 1954년 화재로 인해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고 현재는 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 있다. 최근에 복원완료돼 북촌댁과 함께 마을의 남북을 지탱하고 있다.
하회주일재(중요민속자료 91호)는 서애 선생의 증손 류만하 공이 충효당에서 분가할 때 지었으며, 류시주가옥(중요민속자료 87호)은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 류도관 공의 호를 따서 작천고택이라 불렀으나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빈연정사(중요민속자료 86호)는 겸암 류운룡 선생이 45세 때인 선조 16년(1583)에 진보현감으로 있다 모친의 병환을 이유로 사퇴하고 돌아왔는데, 이해 4월 빈연정사가 완성되었고 선생은 이곳을 서재로 사용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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