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 정치, 혹은 우연의 간계

입력 2012-04-23 09:09:05

두 편의 정치영화를 소개하려 한다. 하나는 지난주에 개봉한 '킹 메이커'. 명배우 조지 클루니가 감독하고 출연한 이 영화는 미국 선거 과정의 이면도와 같은 영화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캠페인에 나선 모리스는 경쟁자와 박빙의 승부를 이어가다 패배의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결국 극적으로 승리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모리스는 두 가지를 버렸다. 하나는 공적인 대의, 또 다른 하나는 사적인 의리. 모리스는 수상쩍은 상원의원 톰슨을 신뢰하지 않지만 그에게 부통령 자리를 약속한다. 그와의 연대가 승패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리스는 자신을 오랫동안 충직하게 보필한 공보팀장을 해고한다.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는 영악한 공보팀원 스티븐이 팀장 자리를 원했기 때문이다.

모리스가 경선에서 승리하는 결말을 보고, "역시 정치는 추악해"라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다. 이 영화의 정말 흥미로운 점은 이면의 추악함 자체가 아니라, 추악화의 메커니즘이다. 모리스는 말한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정하고 나면, 그걸 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긴다. 그래서 확장된 타협의 선을 다시 정한다. 그러면 그걸 넘어야 할 일이 또 터진다. 그러다 여기까지 왔다."

무엇이 선을 넘도록 강요하는가. 권력욕이 답일 것 같지만, '킹 메이커'가 숨겨 놓은 답은 뜻밖의 장소에 있다. 그것은 우연의 간계(奸計)이다. 모리스는 시종 야비한 정치꾼 톰슨과 손잡을 생각이 없었고, 팀장 폴을 신뢰했다. 대의와 의리를 지키면서 패배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간계의 출발은 모리스의 불륜이었다. 아름다운 인턴 몰리와의 충동적 하룻밤과 그녀의 임신 그리고 그녀에게 일어난 일들(영화를 곧 보실 분들을 위해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이 모든 것을 뒤바꿔 놓는다. 모리스에게 이제 경선 패배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그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도덕적 파탄자이자 간접 살해범이 될 것인가, 아니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 것인가.

모리스는 후자를 택한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당당한 패배자, 아름다운 도전자로 남는 건 충분히 유혹적인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이, 드물지 않은 하룻밤 실수의 대가로는 너무 가혹한 파렴치한 반인륜 사범으로의 몰락이라면? 더구나 그에게 제시된 또 다른 선택이 거대한 승리라면?

모리스는 잠깐 탄식했을 것이다. '그날 밤 몰리가 내 방으로 서류를 가지고 올 일이 없었더라면, 한 번의 정사로 임신이 이뤄지는 불운이 없었더라면….' 그가 탄식해야 할 일은 더 많다. 스티븐이 조커를 쥔 킹 메이커가 된 것은 경쟁자 진영의 치밀한 공작에서 비롯되었다. 혀를 내두를 만한 치밀한 심리 게임이자 정치 공작이 거꾸로 자기를 향한 칼이 된 것이다.

'킹 메이커'에 묘사된 정치는 진실을 향한 투쟁도, 치밀하고 사악한 게임도 아닌, 그 모든 것을 무력화하는 우연의 간계 위에서 벌어지는 허깨비놀음 같은 것이다.

짧게 언급할 또 다른 한편의 영화는 'J. 에드가'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했고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주연을 맡았으나 DVD로 직행해버린 이 걸출한 전기 영화의 주인공은 존 에드가 후버이다. 그는 1924년 29세의 나이로 FBI 국장에 취임해 1972년 5월 2일 죽을 때까지 48년간 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절대적인 권한을 휘두른, 미국 우파 정치학의 심장과도 같은 인물이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에드가의 극우 정치학을 그의 동성애 욕망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으로 암시한다는 점이다. 반세기 동안 대통령마저 좌지우지한 이 장막 뒤의 절대권력자가 미국 사회에 미친 그 막대한 영향이 극히 사적인 동기의 결과라면 누군가 이렇게 탄식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동성애 유전자를 타고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부모가 그의 동성애 성향을 그토록 가혹하게 억압하지 않았더라면….'

정치와 선거를 말할 때, 민심이니 대세니 하는 단어들이 종종 동원된다. 다중은 선한 의지를 가지며, 그 의지는 반드시 구현된다는 필연성에 대한 믿음이 그 단어들을 끌어냈을 것이다. 그토록 크고 중요한 일이 우연과 특정인의 사적 동기에 의해 좌우된다면 우리의 삶은 견디기 힘들 만큼 불안해질 것이므로 그 믿음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 악랄한 두 편의 영화는 우리의 믿음을 잔인하게 냉소하며 시험에 들게 한다. 내가 가진 믿음은 이 시험을 거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조금 더 나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뿐이다.

허문영/영화평론가·영화의전당 영화처장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