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42)모델 겸 가수 신광우 원장의 대구 두류동

입력 2012-04-21 08:00:00

라디오 가진 부잣집 코흘리개…'교실 리사이틀'로 가수의 길

내 고향은 대구 달서구 두류동. 봄이면 사과꽃이 흐드러지던 고향집 과수원은 어느새 콘크리트 도시로 변했다. 부잣집 아들로 자라다 일순간 가세가 기울어 유년시절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곳. 그 시절이 생각나면 요즘도 고향마을 뒷동산(두류공원)에 올라 색소폰을 불어 본다.
내 고향은 대구 달서구 두류동. 봄이면 사과꽃이 흐드러지던 고향집 과수원은 어느새 콘크리트 도시로 변했다. 부잣집 아들로 자라다 일순간 가세가 기울어 유년시절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곳. 그 시절이 생각나면 요즘도 고향마을 뒷동산(두류공원)에 올라 색소폰을 불어 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부친께서 정미소를 운영했던 두류동 낙원장 목욕탕 자리(왼쪽). 목욕탕 앞 도로는 당시 대구에서 성주를 오가는 비포장 2차로 국도였다.
부친께서 정미소를 운영했던 두류동 낙원장 목욕탕 자리(왼쪽). 목욕탕 앞 도로는 당시 대구에서 성주를 오가는 비포장 2차로 국도였다.
어릴 때 살았던 두류동 집과 넓은 과수원터. 지금은 운동장으로 변했다. 이곳을 찾을 때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당시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아버지께서는 가산을 헐값에 정리해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어릴 때 살았던 두류동 집과 넓은 과수원터. 지금은 운동장으로 변했다. 이곳을 찾을 때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당시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아버지께서는 가산을 헐값에 정리해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신광우 실용음악학원장
신광우 실용음악학원장

측백나무 울타리 안에서 50여 년 만에 본 내 고향 내 옛집은 페허가 된 대지 위로 을씨년스럽게도 삭막한 슬픔의 봄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도 두 눈 감으면 흐려진 눈물 저편으로 아득한 그림자인양 떠오르는 내 고향은 '땅골'이다. 대구시 달서구 두류동 670번지로, 지금 살고 있는 대구 서구 내당동 음악실과 바로 지척에 있다. '못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당곡(塘谷)이 오랜 세월 동안 구전되어 오면서 변음되어 땅골이라고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기록에 따르면, 현 낙동강 수원지 사무소(두류정수장 ) 동북쪽 아래에 노송 세 그루가 있었는데 이 나무를 당산목(堂山木)이라고 불렀고, 그 나무가 있었던 동쪽 안쪽에 위치한 마을을 안땅골(내당산'內唐山), 동남쪽의 두류공원 야구장 서편 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을 바깥 땅골(외당산'外唐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안땅골은 당산목에서 볼 때, 두류2동 일대에 위치하였고, 바깥 땅골은 두류3동으로 추정되고 있다. 1887년 안땅골은 내당동이 되었으나, 두류3동 일대는 지금도 '땅골'이라는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다. 내가 자라던 당시에는 모두 내당1동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5월 파종과 10월 추수를 마친 뒤 당산목 아래에서 재해를 면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당산제(唐山祭)라고 불렀다.

내가 자란 집은 바로 당산목이 위치했던 두류3동 사무소 앞 대구대학 훈련장에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부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큰 양계장을 하셨고, 아버지는 감삼못(지금 광장코아) 맞은편 부근에서 성서정미소(지금 낙원장 목욕탕 자리)를 운영했으며, 큰 과수원도 가지고 있었다.

마을에서 전기도 제일 먼저 들어왔다. 매년 김장철이 되면 호방한 성격의 여걸이셨던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흰쌀밥을 먹여주고, 소달구지에 김장김치를 실어 나누어 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이런 부유한 집안의 2남5녀 중 아들로는 처음 태어났으니, 금지옥엽도 그런 금지옥엽이 없었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양계장을 직접 하셨기 때문에 나는 한 집에 같이 살고 있는 먼 친척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아무 거리낄 것 없는 철부지여서 사고도 많이 쳤다. 그 시절 국화빵이 처음 나왔는데, 나는 그것이 너무 먹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동네 형들이 꼬드겼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양계장에서 닭을 빼내주면, 국화빵을 사주겠다는 것이었다. 국화빵을 먹고 싶은 마음에 낮에 몰래 닭장에 들어가 미리 1, 2마리 닭의 목을 비틀어 죽여 놓고, 저녁에 형들이 휘파람을 불면 몰래 빼내 담장 너머로 던져 주곤 했다. 그 대가로 다음날 국화빵이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우리 과수원도 마을 개구쟁이들의 서리 대상이었다. 물론 앞잡이(?) 노릇은 내가 했다.

한 번은 큰 사고가 있었다. 큰누님의 결혼날짜를 받아놓고 '전기다마'(전구)를 정미소에서 구해오다 그만 삼천리버스에 치이고 말았다. 피를 흘리며 집에까지 와서야 병원에 실려갔고, 지금도 내 머리에 그때 그 상처가 남아 있다. 당시 10살이었다.

바깥일에 바쁘신 어머니, 아버지는 내가 저지른 사소한 장난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도 무서운 사람이 있었다. 열 살 위 큰누님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형들의 과수원 서리를 돕다가 큰누님에게 들켜 호되게 꾸중 들은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큰누님에 대한 추억은 더 있다. 여덟 살쯤 됐을 때, 누님은 대구사범학교에 다니고 계셨다. 부잣집 맏딸에다, 미인이셨던 누님은 동네 총각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어느 날 동네 형들이 "누나 사진을 좀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졸업앨범에서 예쁘게 나온 사진 몇 장 골라 넘겨주었는데, 나중에 어떤 총각들이 누나 사진을 들고 골목길에 기다리다가 누나한테 혼나 도망가는 사태가 빚어졌다. 사진을 넘겨준 범인이 나라는 걸 안 누님에게 콧물과 눈물이 뒤범벅이 되도록 혼났다.

누님은 달리기도 잘했다. 대구사범학교 육상선수로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누님을 기특해하며 육상대회 입상 기념으로 풍금을 선물했다. 과수원 원두막에 올라 밤하늘 총총히 빛나는 별들을 헤아리고 있을 때, 대청마루에서 들리는 누님의 풍금 소리는 마치 자장가처럼 들리기도 했다. 누님은 교직에 몸담고 계신 동안에도 '달리기 잘하는 선생님'으로 인기가 높았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에서 결코 잊지 못하는 분은 단연 나를 키워 주신 할머니이다. 먼 친척이긴 하지만, 친할머니보다도 더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계신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돌봐 주셨다. 과수원에서 땔감을 주워 하얀 흰쌀로 냄비밥을 해주시고, 호롱불 밑에서 사과를 갈아 먹여주시던 할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하늘 아래 그 누구가 이토록 나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이 영원히 계속되진 못했다.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우리 집의 가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면서 마을 사람들의 오해가 불거져 동네에서 데모가 연일 벌어졌다. 이 일로 인해 헐값에 가산을 정리하고 대구 시내(남산동)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이때의 충격으로 아버지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나중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정치적 시련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뒤 할아버지가 도의원에 당선됐지만, 몇 번 출근해보지도 못한 채 5'16쿠데타가 또 일어나 설상가상 가운이 기울어져 버렸다. 그때까지 나를 돌봐 주시던 할머니는 양로원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돌아가셨다. 그래서 가수가 된 이후 450회가 넘도록 매년 양로원 위문 공연을 빠뜨리지 못한 이유도 할머니와의 가슴 아픈 사연 때문이기도 하다. 나에게 고향은 애증이 엇갈리는 곳이기도 하다

가수의 꿈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내당초등학교 시절, 부유했던 집안 덕택에 남들이 부러워했던 제니스라디오를 가질 수 있었다. 매일 낮 12시가 되면, 그 당시 'kbs직장음악시간'이라는 프로그램이 울려 나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두류산에 올라 친구들과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유행가를 부르는 것을 금지했다. 어린이들이 동요를 불러야지, 어른들이 하는 노래를 따라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선생님 눈을 피해 교단 앞에 서서 개인 리사이틀을 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었고, 친구들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냈다. 방운아, 명국환, 도미, 송민도, 나애심 씨 등이 그때 인기가수였는데, 나는 방운아 씨의 '인생은 나그네', '두 남매', '여수야화'를 즐겨 불렀다. 그리고 동네 콩쿠르 때는 송민도의 '행복의 일요일'도 불렀다 가수로는 서울로 가지 못해 큰 히트곡을 못 남겼지만 5집 앨범(내고향 대구)까지 발표해 지금도 노래방에서 애창되고 있다. 고향 부근 내당동에서 실용음악학원을 운영하며 천직처럼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으니. 내 인생의 길은 이미 어린 시절에 결정되었던 것 같다. 척박한 이곳 대구의 연예풍토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해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간다고 자부하고 싶다

내당초등학교 하굣길은 두 방향이었다. 한 방향은 평소 다니는 아이들로 붐비는 찻길인 반고개쪽이고, 또 다른 방향은 상여를 보관하는 집이 있는 좀 외진 길이었다.

봄이 되면 나는 외진 길을 걸으며 혼자 많은 상상을 하며 동네 뒤 고개를 넘어서 집으로 오곤 했다. 그곳에 내 이복동생이 사는 집이 있어 일부러 그랬는지 모른다. 더구나 그 길에는 할머니와 추억이 담긴 공동묘지와 과수원이 있었다. 지대가 높아 울긋불긋한 봄날이 되면 이 마을 저 마을들을 한가로이 바라볼 수 있어 좋았고, 무언지 모를 아릿한 슬픔 같은 것을 삭이며 걸었는데, 그 슬픔이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설명할 수가 없다.

신광우 실용음악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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