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찾아 온 암보다 더 무서운 건 외로움"
17일 오후 대구 중구 동산동 동산의료원 앞. 분홍색 점퍼를 입은 이영순(가명'68'여) 씨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회색 옷을 입었을 때는 얼굴이 형편없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밝은 색 옷으로 갈아입고 병원에 왔어요."
이 씨는 일주일 전 이 병원에서 폐에 5㎝ 크기의 악성종양 제거수술을 받았다. 1995년 직장암 수술을 받은 뒤 또다시 암이 그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씨에게 암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의 곁을 지켜줄 가족이 한 명도 없다는 외로움이다.
◆암보다 무서운 외로움
이 씨는 외로움과도 싸우고 있다.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아들(34) 이름이 있지만 본 지가 십 년이 다 돼 간다. 2009년 든든한 방패였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외톨이가 됐다. 이 씨는 남편도 없다.
그는 서른세 살 때 남자를 사귀며 결혼을 결심했지만 남자는 소리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당시 이 씨는 홑몸이 아니었다. 이 소식을 안 어머니는 그를 붙잡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애를 낳아서 혼자 어떻게 키울 거냐고. 이 힘든 세상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우리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제가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았네요."
30년 전 미혼모에 대한 편견은 극심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가 지나갈 때면 대놓고 비웃었고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이 씨는 동네 사람들이 좋지 않은 말을 할 때마다 귀를 닫고 눈을 감았다. 그는 엄마였기 때문이다.
"사람들 말을 일일이 다 신경 써 가면서 아들을 어떻게 키우겠어요. 두 눈 꼭 감고 열심히 제 할 일만 했습니다."
두 식구의 생계를 위해서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 당시 갓난아들을 어머니에게 맡겨두고 대구 서구 이현공단의 섬유공장에 출근했다. 공장을 다니며 틈틈이 남는 시간에는 다른 사람 집에 가서 가사 도우미 일을 했고 식당에서 설거지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먹고사는 것은 언제나 빠듯했다.
그는 항상 아들에게 미안했다. 아들과 단둘이 앉아 밥을 먹을 때면 도란도란 웃음꽃 대신 정적이 흘렀다. "지금껏 아버지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했지요. 일평생 아비 없이 살아왔으니까. 이게 다 못난 엄마 때문이지요."
◆사라진 아들
1995년 이 씨의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배가 아파 병원을 찾아갔더니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암 때문에 10년 넘게 다녔던 공장을 그만뒀다. 암에 걸리기 전에 암보험을 들어둔 터라 보험금으로 수술비와 입원비를 냈다. "그때는 아들도 옆에 있고 어머니도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하지만 아들은 군대를 제대한 뒤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도 드물었던 시절이라 연락을 취할 방법도 없었다. 어느 날 아들은 갑자기 전화를 걸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끊었다. "엄마, 이제 나 혼자서 살아볼게. 나중에 성공해서 다시 엄마를 찾으러 갈게요."
이 씨는 아들이 곧 돌아올 줄 알았다. 일주일, 한 달, 1년, 10년을 기다려도 아들은 결국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 씨의 삶은 더 어려워졌다. 직장암 수술 뒤 장시간 일하기 힘들어 지인들의 소개로 산후 도우미로 일하거나 옷 수선을 하며 푼돈을 벌었다. 힘든 삶을 살면서도 그는 항상 언젠가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들은 1년에 한 두 번 씩 전화를 걸어 "서울에 살고 있다", "나중에 성공하면 엄마를 찾아가겠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엄마가 무슨 낯으로 돌아오라고 강요하겠어요.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지요." 하지만 아들의 휴대전화번호가 바뀌면서 1년 넘게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생계급여 한 푼 못 받아
현재 이 씨의 수입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보내주는 후원금 6만5천원이 전부다. 2007년 3월에는 기초생활수급자에서 탈락했다. 일정한 소득이 있는 아들이 부양 의무자로 올라가 있어 생계비 지원이 끊겨버린 것이다. 앞으로 암 치료에 들어갈 돈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 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씨가 기초생활수급자였을 때 임대보증금 350만원짜리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해 지낼 곳이 있다는 점이다.
2009년 7월 이 씨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머니가 숨진 뒤 성당에 나갔다. 1년 전 세례를 받고 '임 아리아'라는 세례명도 얻었다. 손자, 손녀들을 품에 안고 기뻐하는 노인들을 보면 하염없이 부럽고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지만, 이제는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면서 참 많이 울었지요.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려고요." 이 씨에게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암 수술을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아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에게 지금 암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리움이라는 병이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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