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첨단'은 표면적으로 상극적 측면이 아주 강함에도 인류문명사에 있어 절묘하게 조합하며, 아름다운 상호공존의 궤적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의 갈등과 융화는 때때로 정체된 사회현상에 신선한 생기를 불어넣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왔으며, 더 나은 사회발전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사실, 섬유분야만큼 전통과 첨단 사이에 구분이 애매모호한 상황도 많지 않으며, 숱한 논쟁을 야기하는 경우도 드물다. 전통산업 하면 으레 섬유산업을 떠올린다. 재래, 굴뚝산업으로 분류되어버리거나 단순 제조기능만 부각되며, 첨단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어떤 분야 못지않게 무에서 유를 추구해내줌과 함께 변화와 혁신을 주력하고 있는 분야가 섬유이다.
실제로,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현대산업사회 구현의 뿌리가 되고, 삶의 질 개선에 혁혁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 발단이 섬유산업의 혁신적 공정개선이었다. 당시까지 단순 수공업에 의존하던 생산시스템을 동력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대량생산, 분업화, 전문화를 일구어냈으며, 산업과 과학의 빠르고 다양한 접목으로 소비의 보편화를 유도했다.
이처럼 제조분야에 혁명을 가져온 영국섬유산업의 발달 영향은 곧바로 인근지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을 거쳐 일본 등으로 전이돼 세계경제를 하나의 권역으로 묶는 계기가 됐다. 이후 2세기 반이 지난 오늘날까지 섬유패션산업발전의 선도와 함께 많은 선진 유행을 주도하며, 경제대국의 반열에 우뚝 서 있다. 소위, 잘 사는 나라들인 이들 국가에는 오늘날에도 우리 지역의 섬유산지처럼 든든한 섬유생산 집산지를 당연히 확보하고 있으며, 지원시책을 아끼지 않고 있기도 하다. 현대산업적 측면에서 보면 언뜻 엉성하기도 하고, 시대에 뒤처지고,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이 전통적 제조분야를 이들 국가가 함부로 간과하지 못하는 것은 섬유가 국민생활의 기초 생필품이고 생활문화의 근간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성장과 안정을 위한 변화와 혁신의 가장 원초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도 섬유산업의 기여도는 매우 크다.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것 같던 그 끈질긴 애옥살이를 오늘날 이만큼이나마 윤택하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지역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맥맥이 이어져 오고 있는 섬유산업은 한때 마땅한 일거리도 없고,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 실정에 애오라지 외화 가득의 주요 소득원이었고, 경제발전의 소중한 종잣돈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 최근에는 섬유산업의 활기가 왕성해지고 있으며, 영역도 매우 넓어지고 있다. 신규투자와 가업 승계도 늘고 있다. 5, 6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연구개발분야도 다양화, 첨단화되고 있다. 의류분야에 국한되어 있던 개발소재가 산업용 등 비의류용 분야로 확산되고 있고 인공피부, 인공혈관 등 인공장기 개발을 비롯해 에어로젤 등 꿈의 신소재에까지 관심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하지만 현재 지역의 섬유생산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그리고 세계 섬유산업도 큰 전환기에 놓여 있다. 섬유기계산업의 급속한 발달에 의한 생산능력 향상으로 앞으로 단순 범용품 생산은 설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점차 커지고 있다. 차별화되고 특화된, 그리고 시장수요에 부응한 선진적 지식상품이 아니면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다. 또 모름지기 섬유제조업은 정보화사회, 지식산업사회에 있어서도 상품공급원의 주요 버팀목이다. 자국의 충분한 공급기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국민소비는 불안할 수밖에 없으며, 경제안정에도 많은 애로를 노정하게 돼 있다.
이처럼 대내외적 환경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섬유산업이 지역에서 계속 뿌리를 내리고 지속적, 안정적으로 존립할 수 있도록 새로운 모멘텀이 조속히 마련됐으면 한다. 첨단섬유부품소재 전용단지 조성으로 섬유제조 환경의 이미지를 개선함과 함께, 여건이 열악한 기존공단의 리모델링으로 섬유인이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사기진작 시책이 있었으면 한다. 신규 일자리 창출노력도 중요하지만 전통적 제조업에 대한 일자리 보전과 경험의 대물림을 이어갈 수 있는 지원방안 강구도 매우 시급하다.
따라서, 미래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전통과 첨단분야가 병렬적, 상생적 성장을 기할 수 있는 '투 트랙적 출구전략'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전통분야인 섬유산업 환경을 현대화, 첨단화하는 방안을 마련해 새로운 활력을 확보하게 해 주고, 신수종 첨단산업분야와는 주요 부품소재 공급원으로서 동반성장의 중요한 파트너십을 형성케 하는 것이다.
박원호/한국섬유개발연구원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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