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행복편지] 횟대보

입력 2012-04-17 07:21:23

나는 '이야기 낚시질'을 즐깁니다.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찾는 재미는 참 솔솔합니다. 이야기 실개천을 따라 오르내리노라면 금방 바닥이 드러날 때도 있지만 아주 넓은 이야기 호소를 만나기도 합니다. 나는 파닥거리는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을 때 감지되는 조사의 손맛처럼 나만의 특별한 희열에 빠지곤 합니다.

그래서 더디지만 고문헌을 샅샅이 뒤지기도 하고 켜켜이 현향(玄香)이 밴 오랜 조형물이나 촌락을 찾아가기를 아주 즐깁니다. 삶의 이야기를 오롯이 간직한 사람을 만나는 일도 예외가 아니지요.

한번은 어느 산촌을 찾았습니다. 800고지의 높은 산을 기댄 ㅎ씨의 집성촌입니다. 겨울이라 더욱 고즈넉한 그 마을은 현대문명을 외면하고 사는 곳 같았습니다. 나는 그 마을의 문장댁을 방문하였습니다. 문장 어른은 집안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내가 반가웠던지 탱자만 한 작은 산능금을 한 바구니 내 놓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냅니다. 나는 빨간 능금 하나를 집으려다 말고 이야기보다 한쪽 벽면에 눈길을 빼앗깁니다. 집안 내력을 담고 있는 낡은 흑백 사진 액자와 흰 광목이 살짝 바랜 채로 걸려 있는 횟대보가 얼마나 반갑던지요. 나는 순간 잊어버린 나의 한 시절을 만나는 것 같아 싸하게 젖어드는 감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횟대보는 벽에 걸어둔 옷을 가리는 데 사용한 일종의 큰 보자기이지요.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거의 집집마다 횟대보가 벽면 한쪽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보자기를 즐겨 사용한 우리네의 습성이 참 지혜로웠습니다.

전통적인 장롱은 바느질 결대로 차곡차곡 옷을 개어서 보관하는 곳이지만 말쿠지에 걸어서 보관하는 양복장은 전통의 장롱에 비하여 모양이나 규모가 다릅니다. 횟대보는 양복을 갈무리하는 현대식 농이 널리 사용되기 전에 쓰인 일종의 보자기농(?)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현대화기 초입의 산물이지요.

미술평론가이자 전통자수 수집가인 박신 교수는 "횟대보는 영천을 비롯한 그 인근지역에서 가장 흔하게 만들어졌다"며 대구에서 섬유산업이 발전한 것과 관련성이 깊다고 합니다.

결 따라 한 땀 한 땀 수놓은 횟대보에서 나는 여인의 손때와 정감을 만납니다. 하얀 옥양목 바탕에 청실홍실로 뜬 갖가지 십자수를 꼼꼼히 살핍니다. 다만 옷을 보관하는 기능과 도구성을 넘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미적 감성을 엿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신하고도 소박하게 살던 시절의 아낙들이 작은 바늘 끝으로 자신을 노출한 감정공간이기도 합니다. 호박 넝쿨과 같은 당초 문양 위에 마치 상상의 세계에서 날아든 듯한 낯선 도형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 sweet home, 혹은 福, 喆자와 같은 낯익은 글자도 한쪽에 새겨져 있습니다.

여인들 중에는 자신이 뜬 문양이나 글자의 뜻을 모르기도 했을 겝니다. 그래도 나는 타박하지 않습니다. 자수 바늘 끝에 몰입하던 여인들은 그 의미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복되고 사랑받는, 안락한 가정을 희망하거나 아름다운 수를 놓는다는 미적 구현에 충실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 시절의 아낙들이 진정 그 문양의 의미를 몰랐어도 수를 놓는 순간순간 자신의 가슴을 데울 만큼 행복했으리라 믿습니다.

나는 문득 편리 중심의 가치 속에 묻혀버린 우리의 애틋한 서정이 그리워집니다. 양지녘 토담 아래서 진종일 머물다 가는 다순 햇살을 손짓해봅니다. 삼태성을 기다리던 긴긴 겨울밤 하늘의 정감이 서러우리만치 아련해지기도 합니다. 참빗으로 빗은 머릿결같이 반지르르 윤기를 드러낸 장독대며 짚 멍석에서 풍겨나는 풋풋한 내음들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동구 밖의 성황당이 사라진 지 오래고 다산과 풍년을 기원하던 남근석상도 기억을 더듬어내기가 어렵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앞 세대들의 삶에 운율과 유희를 더하여 준 24절기는 오늘날 온갖 이벤트 데이에 가려진 듯합니다. 속도와 기능성을 좇는 현대인들은 늘 새로운 것들을 숨 가쁘게 만들어 냅니다. 반면에 일상적 서정을 확충해주는 미적 경험의 세계는 자꾸 좁아드는 것만 같습니다. 세월이 가면 우리들의 자리에 다음 세대가 어김없이 들어섭니다. 나는 집 안에서, 집 밖에서 그들이 향유하고 유희할 수 있는 감성토양을 북돋우고 싶은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스스로 체감하고 미적 감흥을 일으키게 하는, 그런 공간과 기회가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김정식/담나누미 스토리텔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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