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에 들어서니 오후 4시, 장은 이미 파장(罷場)이다. 시장 바닥에는 양 볼이 빨갛게 물든 토마토, 초록 빛깔의 미나리, 쑥, 달래, 돌나물 등 형형색색의 과일과 봄나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들녘의 과일도, 산나물도 적막함이 싫었을까. 사람 냄새 나는 이곳으로 나들이했다. 시장 끄트머리 할머니 좌판에는 초록색 풋고추와 남색 가지가 말간 낯을 하고 있다. 해종일 가댁질하다 들어온 나를 말갛게 씻겨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30년 전에 영면하셨다. 이달에는 산소에라도 한번 찾아봬야겠다.
장터 옆 허름한 국밥집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주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눈인사를 한다. 등받이 없는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으니 술국부터 내어놓는다. 밤새도록 푹 삶은 돼지고기에 시래기와 부추, 대파를 넣고 끓여낸 국물이다. 한 숟가락 떠먹어보니 속은 물론 마음까지 시원해온다. 은퇴 이후 이 맛에 자주 들르는 집이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뜨신 국물을 후후 불며 떠먹는 아내의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에다 두툼한 스테이크 칼질 한 번 못 하고 매양 들르는 이런 곳이 좋단다. 속이 빈 못난 마누라 같으니라고.
옆자리에는 파장꾼들로 좁아터진 술집이 자글자글 끓고 있다.
"어이! 여기 막걸리 한 병과 돼지국밥 두 그릇."
여기저기서 연신 불러댄다. 햇볕에 검게 그은 주인아저씨 얼굴에 웃는 낯꽃이 피어 있다. '똑똑 똑!' 아주머니의 도마질 소리도 요란하다. 부부의 얼굴에 생기가 넘친다. 그러고 보니 얼굴 생김새도 남매처럼 닮았다. 금실이 좋은 부부일수록 서로 닮는다는데, 부부애가 남다른 모양이다. 오늘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인물 훤한 총각이 음식을 나르고 있다. 술 취한 장터 사람들의 투박한 호통소리에도 웃으며 대한다.
"등록금을 벌겠다고, 이런 험한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니, 쯧쯧!"
아내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왁자지껄하던 술집이 갑자기 조용하다. 불콰한 얼굴로 떠들어 대던 장꾼들이 줄줄이 나가고 있다. 한 차례 큰 물결이 지나간 것 같다. 막걸리 한 병을 새로이 가져다주는 아주머니에게 아내가 묻는다.
"저 알바(아르바이트)생 참 잘 생겼어요. 새로 들어온 모양이지요?"
주인아주머니가 멀뚱히 쳐다보더니 한마디한다.
"알바생이 아니고 올해 대학 들어간 우리 아들입니다.
"……"
새내기 대학생,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멋 부릴 나이에 부모를 돕겠다고 이런 곳에서 일을 하다니. 벌어진 아내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김성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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