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과 밤새워 노래대결…300여곡 불러 항복받았죠"
이동순(62) 영남대 국문과 교수. 그는 문학계에서 가요의 지존으로 통한다. 그가 지존으로 불리게 된 것은 지존 타이틀을 놓고 벌인 노래 대결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가 충북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985년, 문학계에서 탁월한 노래꾼으로 이름을 떨치던 김지하 시인이 청주에 노래 잘하는 교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노래 대결을 청했다. 강호의 두 고수는 저녁 8시쯤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노래 배틀에 들어갔다. 한 곡 두 곡 주고받던 노래는 100곡, 200곡을 넘어서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300여 곡이 쌓인 새벽 4시쯤 겨우 승패가 갈렸다. 밑천이 떨어진 김지하 시인이 "어이 징그럽구나"하며 뒤로 벌렁 누워버린 것. 문학계에서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는 이 대결로 인해 이 교수는 가요 지존의 반열에 올랐다. 훗날 김지하 시인은 "이 교수는 밥 먹듯이 노래를 부른다"는 표현으로 이 교수의 노래 실력에 찬사를 보냈다.
이 교수와 가요에 얽힌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책으로 엮어도 될 정도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이 교수는 일반인들에게는 가요 해설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코디언 연주를 곁들여 걸쭉한 입담으로 풀어놓는 그의 가요 해설은 한 번 듣기 시작하면 지겨운 줄 모르고 빠져든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20분을 잡아 놓고 이 교수를 초청했다 그가 쏟아내는 가요 해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긴급 편성으로 시간을 45분으로 늘린 적이 있을 정도다. 또 그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대구MBC 라디오 프로그램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때아닌 가요 열풍도 불러일으켰다.
그의 입담은 학교 강의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그가 개설한 '한국의 대중가요와 생활사' 과목은 8년여째 인기 과목으로 장수하고 있다. 수강생이 너무 많이 몰리는 바람에 선착순으로 100명만 수강 신청을 받고 있다. 수강 인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듣고 싶은 학생이 많다 보니 인터넷을 통해 수강권을 사고파는 기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웬만한 가수보다 가요를 더 사랑하는 문학계의 기인, 이 교수를 만나 인생 스토리를 들었다.
◆외우는 가요 700여 곡
이 교수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발표된 가요는 거의 다 알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부터 한국전쟁 무렵까지 나온 가요는 가사뿐 아니라 야사까지 훤히 꿰고 있다. 그가 외우고 있는 가요는 무려 700여 곡에 이른다. 노래방 문화가 발달하면서 모니터를 보지 않으면 노래 한 소절도 부르지 못하는 요즘 세태에 비추어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주위에서 몇 곡 정도 외우고 있는지를 묻는 사람이 많아 최근에 목록을 작성해 봤더니 700여 곡 정도 됐습니다."
또 그는 LP 음반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SP 음반 1천여 장도 소장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열병을 앓는 환자처럼 전국을 돌며 수집한 것들이다. 현재 1천여만원을 호가하는 이애리수의 '황성옛터' 음반을 비롯해 좌익가요로 분류된 '우리의 노래' 등 희귀 음반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교수는 해박한 가요 지식을 바탕으로 가요 해설사로 활약하고 있다. "가요는 대중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양음악에 비해 푸대접을 받아 왔습니다. 딴따라, 뽕짝문화 등으로 비하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요의 문화적 번지가 없었던 셈이죠. 서양음악을 해설해 주는 전문가들은 많지만 가요를 전문적으로 해설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양음악에 묻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가요의 가치를 알리는 가요 해설사라는 타이틀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는 SP 음반을 수집하고 가사를 해설하는 단계를 넘어 흘러간 가요를 학문적으로 재조명하는 일도 하고 있다. 국문학자가 옛 가요를 연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강점기 때부터 SP 음반이 사라진 1965년 무렵까지 발표된 노래의 가사는 시인, 극작가 등 문인들이 쓴 것입니다. 하나같이 예술성이 뛰어나고 문학적 표현 기법이 우수합니다. 또 가사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문화적 산물입니다. 하지만 가사는 그동안 국문학의 연구 대상에서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가사를 학문적으로 다루고 싶어 음반을 수집하고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요 에세이 '번지 없는 주막-한국 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 등을 출간하고 가요 관련 논문도 8편 정도 발표했을 만큼 가요 연구에 심취해 있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가진 시인이자 평론가
이 교수는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난고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한 유능한 시인이자 평론가다. 그의 문재는 일찌감치 빛을 발했다. 영남대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마왕의 잠'이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1989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도 문단에 발을 디뎠다.
이 교수는 '민족시의 정신사' '시정신을 찾아서' 등의 평론집과 14권의 시집을 펴낼 만큼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다양한 삶의 이력과 풍경을 평이한 시어로 담백하게 풀어내는 시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작품 경향은 지난해 펴낸 14번째 시집 '묵호'에서도 잘 드러난다. 묵호는 강원도 동해시의 옛 이름이다. 묵호는 공식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동해 시민들의 마음속에 정감적으로 녹아 있는 공간이다. 이 교수는 이 공간(묵호)을 통해 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시를 통해 묵호를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이달 23일 동해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는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묵호와 동해 바다와 관련된 20여 곡의 가요를 소개하며 특강도 할 예정이다.
이 교수는 분단과 이념 갈등의 암울한 현대사 속에 파묻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시인과 그들의 작품을 발굴해 새롭게 조명하는 일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다. 그는 백석, 권환, 조명암, 이찬, 조벽암 등 재북'월북 작가들의 시선집을 발간하고 분단 이전과 이후 시인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고찰한 '우리 시의 얼굴 찾기' 등을 출간했다. 조만간 1925년 결성되어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을 펼쳤던 카프(KAPF)의 회원 박세영 전집도 펴낼 예정이다.
이 교수가 분단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19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로 등단을 했지만 1980년에 발표한 첫 시집 '개밥풀'부터 분단의 아픔을 시에 녹여 내기 시작했다. "사물에 대한 지각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면서 분단이 우리 삶에 미치는 독소적인 면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시대적 상황도 분단과 민족문제가 화두였습니다. 제가 모더니즘을 벗어나 분단 문제로 눈을 돌리게 된 이유입니다."
이 교수는 3년 전부터 미국 워싱턴 소재 자유아시아방송(RFA)의 '남북이 같이 듣는 노래'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전화로 녹음한 그의 육성은 단파 라디오를 타고 북한에 전달된다. 그는 노래가 남북한 주민을 하나로 엮어 주는 가교 역할을 할 것 같아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가요 사랑과 글쓰기의 원천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이 교수는 중학교 다닐 때 벌써 가요에 심취해 있었다. 노래가 좋아 노트에 가사를 빼곡히 적은 뒤 외우며 다닐 정도였다. 지금 알고 노래 가운데 500여 곡은 중학교 때 외운 것이라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노래 실력도 뽐냈다. "소풍 가서 반 대항 노래자랑을 하면 최고상은 늘 제 몫이었습니다. 재수할 때 친구 이모집에 식객으로 얹혀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밥만 축내고 있는 것이 미안했는데 마침 마을에서 노래자랑이 열렸습니다. 노래자랑에 출전해 받은 밀가루 등으로 친구 이모에게 점수를 딴 적도 있습니다."
이 교수가 어린 나이에 유행가에 빠져든 이유는 무엇일까? 이면에는 행복하지 못한 가족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교수는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태어난 지 10개월쯤 되는 때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이 교수는 늘 어머니를 그리며 살았다. 하지만 사무치게 보고 싶었던 어머니의 존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그는 유행가에서 어머니의 숨결을 느꼈다. 당시 그는 어머니에 관한 노래들을 특히 좋아했다. 백년설의 '어머님 사랑' 등을 가슴으로 부르며 어머니 없는 허전함을 달랬다. 당시 유행가는 어린 소년의 상실감을 어루만져주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이 교수가 글을 쓰기 시작한 배경에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다. 그는 중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글의 주제는 대부분 어머니에 관한 것이었다. 이 교수는 어린 시절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았다고 했다. 사람의 눈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툭하면 얼굴을 붉힐 만큼 소심한 소년이었다는 것. 그러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열등감을 벗고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글이 어린 시절의 상처를 보듬어 준 존재가 된 셈이다.
이 교수에게 어머니는 지금 어떤 존재로 남아 있을까. "어린 시절에는 원망과 갈증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동반자입니다. 제가 바라보는 모든 사물 속에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시를 쓴 것이 아니고 어머니가 제게 시를 쓰도록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 글의 근원이자 물줄기입니다."
◆"가요사 총정리하고 싶어"
이 교수는 지금까지 52권의 책을 냈다. 왕성한 그의 학문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이 교수는 가요계의 야인으로 살아온 자신에게 주어진 앞으로의 과제는 부분적으로 다루어왔던 가요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라고 했다.
또 그는 시인으로 동학농민운동을 재조명하는 한편 춤의 관점에서 사물을 파악한 시집도 출간할 계획임을 밝혔다. "우리 지역은 동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고향이 경주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고 소멸해 간 전 과정을 따라가며 서사시로 남기고 싶습니다. 율동적인 측면에서 사물을 보면 사물의 움직임이 춤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걸어가는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는 모두 리듬이 들어 있습니다. 1, 2년 후에 발표할 15번째 시집에서는 춤이라는 렌즈를 통해 사물을 형상화한 시를 선보일 생각입니다."
이 교수는 산악자전거 마니아다. 2001년 건강이 좋지 않아 산악자전거를 시작한 그는 자전거 바퀴가 닳도록 다녔다. 지금까지 달린 거리만 7만㎞를 넘는다. 국내의 경우 미시령, 한라산 1100고지, 지리산 성삼재 등 높다는 곳은 죄다 자전거로 정복했다. 자전거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일주하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내륙 중부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 적도 있다. 기자의 눈에 비친 이 교수의 산악자전거 사랑과 학문을 향한 열정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국내외를 거침없이 질주하듯,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탐구욕으로 학문의 바다를 거침없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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