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화병

입력 2012-03-26 11:08:36

화병(火病'hwa-byung)은 화가 쌓여 스트레스성 장애를 일으키는 정신 질환으로 영어 사전에 실린 몇 안 되는 우리말이다. 1996년 미국 정신과협회가 문화 관련 증후군의 하나로 등록했다. 의학적으로는 대가족제, 극심한 가난, 전쟁의 고난을 겪으면서 화가 나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 고유의 문화적 특성에서 생기는 병이라는 좁은 뜻이다. 하지만 불안함, 답답함, 우울증, 의욕 상실과 심하면 공황장애를 보이는 증세는 심인성(心因性) 장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 일반적으로는 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 화병으로 통칭한다. 어떤 이는 화병을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라는 급한 성격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최근, 이 화병과 관련시킬 수 있는 두 가지 뉴스가 있었다. 하나는 '한국인 급한 성질 베스트 10'이라는 설문 조사였다. 이에 따르면 상대방이 통화 중인데 전화 안 받는다고 3번 이상 계속 전화하는 사람이 1위에 꼽혔다. 현금 인출기나 마트 계산대에서 짧은 줄을 찾아 왔다갔다하는 사람, 컵라면에 물을 붓고 나서 3분을 못 참아 계속 면을 뒤적이는 사람이 각각 2, 3위에 올랐다. 10위까지 보면 대개 본인이나 주변의 많은 사람의 성격과 비슷해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좀 심각하다. 최근 5년 동안 공황장애 환자가 매년 10%씩 늘었다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통계다. 40대가 28.7%로 가장 많았고, 50대 23.4%, 30대 20.6% 순이었다. 공황장애는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불안해져 숨이 막히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죽을 것 같은 공포 증세가 나타난다. '특정한 사실에 대한 화'만 붙인다면 증상이 화병과 거의 같은 셈이다. 40, 50대가 많은 것은 구직에서부터 결혼, 자식과 부모 부양 등 온갖 문제를 부담해야 하는 세대라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이 두 가지 뉴스는 멀쩡한 사람도 화병에 걸리게 할 만큼 답답한 우리나라의 현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경제난과 높은 물가, 취업난과 해직,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만히 있어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이 콱콱 막힌다. 여기에다 정치권은 한 술 더 떠 보수와 진보의 대결을 넘어 이제는 보수와 보수, 진보와 진보가 서로 갉아먹는 '땅따먹기' 싸움에 여념이 없다. 이러다가 화병이 심인성 화병과 정치적 화병으로 나뉘어 영어 사전에 올라가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정지화 논설위원 akfmcp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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