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부림 사람 경재 홍로와 군위 양산서원 왕버들

입력 2012-03-22 14:38:44

3그루 남아 600여 년 강건한 수세 자랑

우리나라에는 아름다운 산이 많으나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산이 팔공산이라고 늘 자랑해 왔다. 그러나 마음속에 걸렸던 것은 명산에 걸맞지 않게 유방선(柳方善)의 '공산', 서거정(徐居正)의 '팔공산', 김시습(金時習)의 '망공산'(望公山), 황준량(黃俊良)의 '선주암폭포', 하시찬의 '팔공산팔경' 등을 제외하고는 팔공산을 예찬한 시문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동방유학의 시조'로 불리는 포은 정몽주가 팔공산 동쪽 끝자락 영천 임고에서 태어났기에 팔공산이 '조선 유학의 발상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또한 1387년(고려 우왕 13) 포은이 문인 13명과 함께 동화사에서 시회를 열어 팔공산의 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시회에는 야은(冶隱) 길재(吉在'1353~1419)와 경재(敬齋) 홍로(洪魯'1366~1392)도 참석했다.

두 분은 비슷한 점이 많다. 즉 금오산과 팔공산에서 은거한 점, 낙향 후 마을 이름을 율리(栗里)라고 하여 도연명의 삶을 닮으려고 한 점, 벼슬이 문하주서와 문하사인으로 고려의 관료였다는 점, 사림에 의해 금오서원과 양산서원에 배향된 점, 소'대과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간 점 등이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었으니 야은은 포은의 학문을 계승해 강호 김숙자-점필재 김종직-한훤당 김굉필-정암 조광조를 통해 조선 성리학의 맥을 잇게 하고 고려 3은의 한 사람으로 충신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진 데 비해 경재는 그렇지 못했다.

경재는 본관이 부림으로 1366년(공민왕 15) 군위군 대율리 한밤마을에서 진사 민구(敏求)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득지(得之)이고, 경재(敬齋)는 그의 아호다. 약관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390년(공양왕 2) 25세 때 허조, 피자휴 등과 함께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포은의 추천으로 과거시험에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자가 임용되는 한림학사를 거처 나라의 모든 정사를 보살피는 중앙의 최고 행정관청인 문하성의 사인(舍人)이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의 권세가 커지면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1392년(공양왕 4) 마침내 병을 핑계로 스승인 포은에게도 알리지 않고 낙향해 집주변에 5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자연을 벗 삼아 살려고 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27세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얼마 후 포은이 알고 과연 '득지로다, 득지로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역시 왜 정 선생께 알리지 않고 내려왔느냐고 하니 '그 분의 마음을 알고 있사온데 찾아가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오히려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포은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곡기(穀氣)를 끊었다. 어느 날 '내 어젯밤 꿈에 태조를 뵈었는데 오늘 돌아가리라'하고 의관을 바로 하고 사당을 참배한 후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절을 네 번하고 '신은 나라와 함께 죽사오니 무슨 말을 하겠나이까'하고 순절했다.

훗날 조선후기 명재상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묘갈명(墓碣銘)에서 이렇게 평했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짐에 야은이 떠나고, 포은이 죽고, 목은이 절개를 꺾지 않고 몸을 마치니 이것은 그 의(義)를 행함에 있어 각기 그 방법은 다르나 나라를 위해 헌신함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경재 홍공은 그 뜻을 숨기었고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으려 한 그의 자취는 아름다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군자들이 논평하기를 선생을 삼은(三隱)의 무리에 두었으니 어찌 근거 없이 평한 것이리오.

경재는 정통 관료들이 밟아야할 코스를 다 밟았고, 시국관에 있어서도 삼은(三隱)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가 뜻을 숨겨 드러내기를 싫어했고, 특히 요절함에 따라 큰 포부를 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번암이 말했듯이 군자들이 삼은의 무리에 두었다고 하니 그 말로 위안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다.

한티재를 넘어 군위로 가는 길에 소위 제2석굴암으로 불리는 군위아미타여래삼존석굴(국보 제109호) 남쪽에 경재와 허백당 홍귀달(1438~1504)과 우암 홍언충(1473~1508)을 기리는 양선서원과 아름다운 정자 척서정이 있다. 그 서원 왼쪽에 경재가 심은 왕버들 5그루 중 3그루가 일찍 죽은 경재의 명(命)을 대신하려는 듯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강건한 수세를 자랑하고 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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