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전·삼존불탱화·3층탑 등 보물급, 천년사찰 자부 가득
대저,
지극한 도는 형상 밖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지라
보아도 능히 그 근원을 보지 못하고
대음(大音)은 천지를 진동하는지라
들어도 능히 그 소리를 듣지 못하도다
이러한 까닭에
가설을 세워 삼진(三眞)의 오묘한 이치를 보게 하고
신종(新鍾)을 내어 달아 일승원음(一乘圓音) 깨닫게 하노라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 명문(銘文) 중에서-
직지사에서 천왕문을 지나면 곧바로 만세루(萬歲樓)라는 거대한 다락이 눈앞을 막는다. 달리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한다. 만세루 옆으로는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은 일반적으로 불이문과 동일선상에 위치한다. 범종각에는 절에서 사용하는 불전사물(佛殿四物)인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이 있다. 불이의 경지에 이른 구도자를 환영하고 하늘의 음악소리를 상징하기 위해 범종각과 불이문이 나란히 서게 됐다는 것이다.
◆나란히 서 있는 만세루'범종각
황악산에도 봄이 찾아왔다. 직지사 누각과 전각에 쌓여 있던 잔설은 며칠 전 내린 봄비로 말끔히 녹았다. 가람 내 소나무 등 수목들도 봄기운에다 한껏 물을 머금었기 때문에 한층 산뜻하고 충만해 보인다.
직지사 큰 법당인 대웅전은 만세루를 거쳐야 한다. 만세루는 이층으로 된 누각이다. 누각 아래로 사람들이 드나든다. 만세루에 들어서자 부처님이 계신 곳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향 타는 냄새가 낮게 깔리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기록에 따르면 만세루는 임진왜란 때 직지사 대부분의 전각들이 불탈 때 함께 피해를 당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소실(燒失)과 중건(重建)을 거듭했다. 지금의 만세루는 1978년 세웠다. 이때 계속되는 화마의 손길에서 벗어날 요량으로 비로전 앞에 있는 황악루와 현판을 바꿔 달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또 범종각 현판은 다른 사찰에서 사용하는 '범어 범(梵)'자가 아닌 '뜰 범(泛)'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범종각 자리가 원래 연못이기 때문에 종각이 물 위에 떠 있음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주인을 달리한 석탑
만세루를 통과해 대웅전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삼층 쌍둥이 석탑이 길손을 반긴다. 이 탑은 원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웅창마을 북쪽 옛 도천사지(道天寺址)에 있었는데, 1974년에 옮겨왔다. 파손되고 훼손된 것을 당시 주지 녹원 스님이 원형대로 복원했다. 탑의 봉우리(相輪) 부분이 없어진 것을 학계의 고증을 받아 복원하고, 1976년 보물 제606호로 지정받았다. 이 탑은 원래 3기로 도선국사가 조성했다고 전한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이다. 전체 높이가 8.1m이고 탑의 높이가 5.3m로 안정감이 있다. 초대 위에 네 개의 석주와 석판으로 입방체를 이룬 탑의 몸뚱이가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신라의 석탑은 2층 기단이 일반적인데, 단층기단을 가진 흔치 않은 양식이다.
직지사 대웅전 앞에는 원래 13층 석탑과 5층 목탑이 있었다. 사적지에 따르면 고려 신종 때 문화시랑평장사를 지낸 임유(林濡)의 시주로 1186년 13층 석탑을 대웅전 앞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또 임란 중에 왜적의 방화로 전각 대부분과 13층 석탑, 5층 목탑이 망실되고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1686년 우담 정시한이 황악산을 찾아 쓴 '산중일기'에는 직지사를 방문하고 "아침에 승려 국청(國淸)과 사찰을 둘러보니 규모가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그곳에 승려가 많았다. 그러나 팔상전(八相殿)의 이층 누각을 짓느라고 산내의 승도들이 분주하게 역사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라고 적혀 있다.
직지사에 세워졌던 13층 석탑과 5층 목탑은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사찰의 탑을 옮겨놓은 것을 보니 아쉽다. 역사의 아이러니한 장면이 겹치면서 민족의 아픔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더구나 소실된 목탑과 석탑을 복원할 자료조차 사라져 아쉬움이 더하다.
◆보물인 대웅전 건축물과 후불탱화
석탑 뒤로는 왼쪽에 석등 1기가 있고 보물 제1576호인 대웅전(大雄殿)이 우뚝 섰다. 천년 고찰 직지사의 중심으로 임란 때 전소됐다가 1735년(영조 11)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했다.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우측에 약사여래, 좌측에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상은 나무로 조성됐으며 모두 둥글고 풍만한 얼굴, 통견(通絹)의 법의, 아담한 불신의 표현 등 원만함을 이상적인 불격으로 생각한 조선 불상 양식을 가장 잘 반영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 분의 부처님 뒤로 3폭의 불화가 걸려 있다. 보물 제670호인 후불탱화다. 비단 바탕에 그린 불화로 길이가 6m에 이른다. 대웅전을 중건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9년에 걸쳐 그렸다. 후불탱화는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불화의 구도와 등장인물, 제작기법 등이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금어(金魚), 세관(洗冠) 등 불화승이 참여했다. 불화의 하단에는 직지사 대웅전 불화를 비롯해 산내 암자와 주변 30여 사찰의 불화를 동시에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어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대웅전 천장에는 연꽃무늬를 비롯해 화려한 단청조각과 함께 닫집 또는 감실(龕室)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형태의 모양이 있다. 이것은 세속의 왕인 임금과 출세간의 법왕인 부처님의 정수리 위에 설치되는데 통상 절의 닫집이 궁궐보다 화려하다.
대웅전 외벽에는 선종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와 동자승이 등장하는 열 폭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인간이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고 기르는 과정에 비유해 묘사한 선종화의 화제(畵題) 가운데 하나다. 단청이 퇴색되고 벽면 일부가 빗물'바람 등에 의해 벗겨지고 훼손됐지만 오히려 더욱 고풍스럽고 멋스럽게 보인다. 한 줄기 바람에 들리는 풍경소리는 더욱 산사의 운치를 더한다.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 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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