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물레길] ⑫'삼강의 문중' 현풍 곽씨 12정려각

입력 2012-03-14 07:32:04

곽준·아들·사위 정유재란 장렬히 전사…딸·며느리도 자결

조선 선조부터 영조대까지 현풍 곽씨 일문이 포상한 12정려를 한곳에 모은 현풍 곽씨 12정려각. 사당 건물은 정면 12칸, 측면 2칸의 주심포집으로 팔작지붕이며 내부에는 2기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다.
조선 선조부터 영조대까지 현풍 곽씨 일문이 포상한 12정려를 한곳에 모은 현풍 곽씨 12정려각. 사당 건물은 정면 12칸, 측면 2칸의 주심포집으로 팔작지붕이며 내부에는 2기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피신했던 네 아들이 아버지를 호위하다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사효자굴.
임진왜란 당시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피신했던 네 아들이 아버지를 호위하다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사효자굴.

달성군 현풍면 지리 현풍 곽씨 집성촌인 솔례마을. 수령이 수백 년은 됨직한 느티나무 노거수 군락지가 보이고 그 한쪽에는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 이라고 새긴 커다란 자연석이 마을 입구에 버티고 서 있다.

자손들에게 충과 효를 대대로 실천하고 청렴과 결백을 가문의 명예로 삼으라는 글귀의 비석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마을을 찾는 길손들에게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솔례마을에는 또 현풍 곽씨 12정려각이 있다. 조정에서 현풍 곽씨 집안에 내린 정려를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이다. 정려(旌閭)는 조선시대 충신이나 효자'열녀들을 표창하는 제도로 정려각은 표창을 받은 마을 입구에 세운 집을 말한다. 현풍 곽씨 집안의 정려는 무려 12개나 된다. 한 가문에 이렇게 많은 정려가 내려진 경우는 전국적으로 드물다.

현풍 곽씨 12정려각 출입문에는 삼강문(三綱門) 현판이 걸려 있다. 삼강은 유교 도덕의 기본으로 신하가 임금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지어미가 지아비에게 지켜야 할 도리인 것이다.

각각 건립 연대는 다르지만 조선 영조 때 한곳에 모아 세웠다. 임진왜란 때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한 곽준 일가(두 아들, 사위와 딸, 며느리), 곽재훈의 사효자(곽결'청'형'호)와 열부 전의 이씨, 광주 이씨, 밀양 박씨 등이 각각 정려돼 현판이 봉안돼 있다.

솔례 출신으로 임란 당시 안음(함양군 안의면) 현감이었던 곽준은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일가족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 아들 이상, 이후, 사위 류문호와 함께 장렬히 전사한다. 비보를 접한 맏며느리 거창 신씨와 딸도 자결했다. 나라를 향한 충(忠), 부모를 위해 목숨을 바친 효(孝) 남편을 따라 목숨을 던진 열(烈)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곽준은 무예가 출중하고 두뇌가 명석해 관찰사 김성일로부터 자여도(창원역) 찰방으로 임명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면과 함께 출전해 크게 공을 세웠다. 무공을 인정받아 1594년 함양의 안음현감으로 부임했다.

곽준은 현감 재임시 선정을 베풀었고 청렴하기 이를데 없었다. 특히 안음 현감으로 나라의 부름을 받고 나서 "선조 대대로 청백함으로써 나라에 보답했거늘, 내 지금 한 고을을 맡은 공인이 되어 조상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다행하지 않으냐"고 밝힐 정도로 만사에 떳떳했다.

그는 임란 후 도원수 권율과 도체찰사 이원익으로부터 황석산성을 축조해 제2의 왜적 침입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산성 축조는 임란이 종결됐지만 왜적이 다시 침략하게 되면 서부 경남 쪽으로 진군해 호남지방으로 빠져나갈 통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왜적들이 호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함양을 지나야 하며 이곳에서 적의 진로를 저지하게 되면 왜군의 진군을 다소 늦출 수 있다는 계책에서였다.

명령을 받은 곽준은 산성 축조와 병기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결국 정유재란(화의교섭의 결렬로 1597년에 일어난 2차 왜란)이 일어나자 함양군수 조종도와 함께 함양, 안의, 거창 등 세 읍의 군민이 황석산성에 피신해 왜장 가등청정과 대치했다.

그 당시 조선의 형편은 임진왜란의 혼란으로 국정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유재란을 맞아 왜적과 전투를 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하지만 김해 부사 백사림이 군사를 이끌고 황석산성으로 와 아군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황석산성은 동북쪽의 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급한 곳이기 때문에 백사림이 동북쪽을 맡고 곽준은 평평한 남서쪽을 맡고 있었다. 왜군은 황석산성 동북쪽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남서쪽으로 쳐들어왔다.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곽준이 활 하나에 화살 3개를 함께 쏘니 모두 적중해 왜군 세 사람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본 왜군은 명궁이 있다며 공격을 잠시 중지했다가 얼마 후 일제히 공격하고 나서자 곽준이 이끄는 부대의 전세가 점차 불리하게 전개돼 갔다. 이때 겁에 질린 백사림이 북문을 열어 놓고 그의 가족을 먼저 피신시킨 후 도망을 치자 왜군들은 일제히 성문으로 몰려 왔다.

밀고 밀리는 전투는 밤새껏 계속됐으나 성은 하루 만에 함락(1597년 8월 18일)되고 곽준의 군사 500여 명이 전사했다. 당시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곽준도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를 본 이상, 이후 등 두 아들이 달려와 아버지를 간호하려하자 곽준은 "나는 직책이 있어서 이 성을 사수해야 하나 너희들은 몸을 피하라"라고 고함치라고 하자 두 아들은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죽는데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서 죽는 것이 불가한 일입니까"라며 왜군과 육박전으로 응수하는 등 사력을 다했지만 그들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곽준은 두 아들의 최후를 보면서 47세의 젊은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사위 유문호도 싸움터에서 전사했다는 소문을 들은 곽준의 딸은 몸종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내가 따라 죽지 않은 것은 나의 가장(유문호)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이제 가장이 전사했으니 내가 살아서 뭐하겠느냐"며 목을 매어 자결한다.

뒤이어 곽준의 맏며느리인 거창 신씨 역시 "남편의 뒤를 따르는 것이 영혼을 달래는 일"이라며 성곽의 망루에서 투신해 끝내 자진하고 만다.

선조 31년(1598년)에 정려를 받은 곽준 일가에 대해 함양군은 황석산 밑에 황암사를 짓고 음력 8월 18일 곽준 일가에 대해 제를 올리고 있다. 이후 곽준은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안의의 황암사당, 현풍의 예연서원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렬공이다.

현풍 곽씨 12정려각에는 남편을 하늘같이 섬기려한 여러 열부들의 진한 감동도 전해지고 있다. 열부들과 관련한 정려의 역사성, 정신적 의의, 가치관은 오늘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가문의 영광에 가려진 여인네들의 애절한 삶과 희생을 보여주고 있다.

-슬프다 가을바람은 어느 곳으로 오는고/ 외로운 마음은 더욱 슬프고 슬프도다…원앙은 서로 이별하여 꽃 수풀을 잃었고/ 짝진 기러기 남으로 날아가니/ 또한 외롭지 아니한가…슬프도다 경물(景物)이여/ 바로 나의 목숨을 재촉하는 때로다/ 더딘 내 목숨이여 어찌 지금에 이르렀는고/ 자애로운 부모님이 살아계시니/ 떳떳한 도리가 막히는구나…낭군이 다시 돌아오실 때 내가 낭군을 따르리라/ 세상 이별을 몹시 슬퍼하였더니/ 저승에서 만날 것을 누가 알까요….

전의 이씨 이명후의 딸로 영조 22년(1746) 12월에 현풍인 곽내용과 결혼했으나 이듬해 남편이 병사하자 첫 제삿날 남편을 따라가기 위해 26세의 나이로 자결한 효열부 전의 이씨 부인이 남긴 규방가사 형식의 절명사(絶命詞)다.

전의 이씨 부인은 남편이 죽자 그 자리에서 따라 죽으려 하다 시부모의 만류로 그만뒀지만 끝내 슬픔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면서 절명사를 남겼다. 국한문 혼용체의 69행 139구로 이뤄진 절명사는 전의 이씨 부인의 시신을 염습하는 과정에 평소 덮고 있던 이불 밑에서 발견됐다.

낭군을 잃은 외롭고 가련한 신세를 한탄하며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킨 전의 이씨 부인. 열(烈)과 효(孝)의 갈등 속에서 낭군과의 상봉을 환상적으로 그리다가 결국은 죽음을 택하는 가련한 심정을 담은 조선시대 여성가사로서의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왜병으로부터 순결을 지키기 위해 투신, 익사한 계공랑 곽재기 부인인 광주 이씨 려(閭)와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대신 칼을 맞아 죽음으로써 남편을 보호한 곽홍원 부인인 말양 박씨 려가 모셔져 있다.

또 시집온 지 한 해도 안 돼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자신이 대신 죽기를 원했으나 남편이 끝내 목숨을 다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한 통덕랑 곽수영의 부인 안동 권씨 려가 봉안돼 있다.

곽씨 집안의 네 효자 이야기도 자식된 도리의 표상을 말해주는 귀감이 되고 있다. 망우당 곽재우의 종제인 재훈의 슬하에는 결, 청, 형, 호의 네 아들이 있었다.

이 네 아들은 임진왜란 때 병환 중에 있는 부친을 모시고 비슬산 중턱(양리)에 있는 동굴에 숨어서 피란하던 중 마침 왜병들이 굴 앞을 지날 때 천식이 심한 부친이 기침을 하자 왜병들이 굴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고 나오라고 하자 효성이 지극한 맏아들이 대신 나아가 죽음을 당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네 차례나 있게 되자 둘째, 셋째, 넷째 아들까지 죽음을 당하고 다섯 번째 기침소리에 왜장이 굴 안을 확인하니 병든 노인이 혼자 나왔다.

왜장이 그 연유를 물어본 즉 노인이 전후 사실을 이야기하자 왜장이 네 형제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곽노인의 등에다 '사효자지부'(四孝子之父)라 써 붙이고 어떤 사람이라도 이 노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조정에서는 네 효자에 대해 정문을 지어 표창했다.

달성'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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