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추억의 흑백사진

입력 2012-03-12 07:28:51

오늘은 봄맞이 대청소를 하는 날이다.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문예지, 시집, 수필집 등을 꺼내어 먼지를 털어낸 다음 장르별로, 연도별로 정리를 해본다. 꾀죄죄하던 서가(書架)가 말간 물에 세수를 한 아이 얼굴같이 금세 허여멀쑥하다.

책장 맨 밑 서랍을 열어보니 누렇게 빛이 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초등학교 졸업사진이다. 픽! 웃음부터 먼저 나온다. 하나같이 여학생은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 남학생은 기운 흔적이 있는 시커먼 교복에 까까중 머리이다.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흑백 사진 위로 그 옛날 졸업식 추억 한 자락이 봄 햇살처럼 내려앉는다. '혁명공약'을 외우지 못한다고 '얼금뱅이' 선생님으로부터 꿀밤을 얻어맞았던 때였으니까 근 반세기 전의 일이다. 널따란 강당에는 장학사, 면장 등 유지들과 학부형들이 많이 와있다. 엉덩이 큼지막한 여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춰 교가를 부르고 나면, 머릿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바른 '포마드 교장' 선생님의 지루한 훈화에 이어 상장이 수여된다. '위 사람은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하여…'로 시작되는 우등상장은 늘 받는 사람이 받는다. 그러나 개근상은 다르다. 농촌 학교이다 보니 6년 개근상을 받는 친구는 아예 없다. 1년짜리 개근상 받는 사람도 고작 한두 명뿐이다. 모내기나 가을걷이 등 농번기 때에는 꼬맹이들도 농사일을 거들어야 하기 때문에 일 년 내내 학교를 빼먹지 않고 다니기란 쉽지 않았다. 이윽고 재학생들의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 합니다~'라는 졸업노래에 이어 졸업생들의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우리들은 물러갑니다'라는 소절에 이르면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자~♬'의 합창이 끝나고 나면 강당 전체는 울음바다로 변한다.

이렇게 농경시대 졸업식의 겉모양은 초라했지만 정은 있었다. 지금의 졸업식 풍경은 어떠한가? 분위기도 의미도 크게 다르다. 일부 학생들이긴 하지만 교복을 찢고 밀가루를 뿌리지 않나? 심지어 알몸 뒤풀이를 강요하고 있다니…. 더구나 올해에는 학교폭력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어서 그런지 교문 앞에는 빨간 경광등을 단 경찰차가 서 있다. 졸업은 학업의 과정을 마친다는 뜻 외에 시작의 뜻도 담겨있다. 건전한 졸업문화가 정착되어 학업를 마치고 사회로 나아가든, 상급학교로 진학하든 간에 새로운 인생행로를 찾는 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는 아래뜸에 살던 용식이가 웃고 있다. 옷소매에는 늘 콧물자국이 뻔질뻔질하면서도 여학생 고무줄 하나는 잘도 끊던 용식이가 입을 헤 벌린 채 서 있다.

김 성 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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