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욕회' 회원, 그들뿐일까

입력 2012-03-12 07:33:54

'욕회'(辱會).

???…. 물음표가 붙지만 한마디로 '욕하는 모임'이다.

모여서 소주 첫 잔 들이켜는 순간부터 욕으로 시작해서 자리 뜰 때까지 모든 대화를 욕으로 끝내는 모임이란 뜻이다. 육두문자는 기본이고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대한민국의 모든 욕은 총동원되다시피 욕이란 욕은 다 쏟아진다. ×××, △△△, #@?….

모임 이름이 '욕회'니까 회원들도 너도나도 입 험한 욕쟁이들일 거라 여겨지지만 실은 자타칭 지성인들임을 자부하는 인물들이다.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허접한 허튼소리는 고사하고 ㅅ자 같은 건 일 년 365일 입에 올리는 일 없고 들어볼 수도 없다. 소위 점잖고 품위 유지비가 만만찮게 든다는 분들이다. 얼마 전 그런 분들이 모여 '욕회'라는 걸 만들었다. 대구의 내로라하는 의사 8명이 회원이다.

'욕회'라는 별난 모임을 보며 두 가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돈 잘 벌고 사회적으로 존대받는 의사들이 하필이면 모임 이름을 '욕회'라 지었을까. 그리고 끼리끼리 모여서 욕이라도 실컷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계층이 비단 그 욕회 회원들뿐일까라는 의문이다.

옳은 진단이 될지는 모르나 원인을 짚어보자. 지금 세상은 참 무섭게 바뀌어가고 있다. 40대는 세월이 40㎞, 60대는 60㎞로 간다는 푸념들도 실은 세월이 빨리 가는 게 두렵다기보다는 편안히 적응하기엔 너무 변화가 빠른 데 대한 자조적(自嘲的) 불안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아온 후진국 개발시대를 벗어나 이제 겨우 배고픈 것 잊어버릴 만하니까 정신세계가 배고파지기 시작한 것이다. 감정과 생각이 냉랭한 SNS 속에서 소통되는 세상에서는 조용히 얼굴 마주 보며 자기 말 들어줄 사람이 사라진다. 네 의견은 어떠냐고 물어와 주는 상대도 없어져 간다. 친구도 마누라도 자식도 점점 서로서로 그런 존재로 변해간다.

성취해 놓은 건 풍요한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외로워져 있는 자신을 보며 무언가 폭발시키고 싶은 응어리가 가슴 깊숙이서 치솟아 오른다. 아침 8시만 돼보라. 거의 모든 TV 프로는 여성들, 아내들 쪽으로 쏠려간다. 남성 소외시대가 닥치면서 우월적 위상은 갈수록 사그라지고 있다. 일식님, 삼새끼 같은 남성 비하의 개그는 기본이고 새로 유행되는 개그들은 좀 과장해서 80%가 남자 바보 만드는 개그들이 판친다. 그런 풍조가 만연돼 가도 어디 가서 분풀이할 데도 없다. 집안에서는 밥 한 끼도 일식(一食) 이식(二食) 계산해 가며 먹어야 하고 직장에선 아랫사람마저 내 돈으로 월급 주면서도 저네 눈치 봐가며 부려야 한다.

바깥세상을 내다보면 더 가슴이 답답해진다. 순리대로 변해 가는 게 아니라 위는 아래로, 아래는 위로. 오른쪽은 왼쪽으로, 왼쪽은 오른쪽으로. 뒤죽박죽 요동치고 뒤집어진다.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고 진짜는 가짜에 밀려 가짜진짜가 된다. 차라리 모르면 약이라도 될 텐데, 하는 짓들이 빤히 속 보이니 아는 게 병이 된다. 먹물 든 지성이 원수라는 생각까지 든다. 신문 정치면과 TV 헤드라인 뉴스 보며 '에라이! @#$들…' 소리가 목젖까지 올라와도 애들 앞, 직원 앞, 가려가며 꾹~꾹 억누르다 보면 냉가슴 화병이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그게 몇 날 며칠 쌓이면 저절로 욕회가 기다려진다.

욕회의 풍경을 보자. '○○원장 오랜만이요' 하던 인사는 '야 이 ××× 안 뒈지고 살아있네'로 바뀌었다. 물론 그 정도 욕은 무지 점잖은 인사다. 어쩌다 좌중의 화제로 올라온 정치인이나 고만고만한 이름 석 자가 뜨면 그야말로 욕으로 도배를 당한다. 욕회 자리에선 지성 같은 건 거추장스런 위선이고 품위 유지 따위는 거지발싸개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욕과 풍자와 해학으로 거지에서부터 대통령까지 입 끝에 걸리는 족족 욕으로 초죽음을 시키고 나면 술맛 안주 맛이 살아난다. 오이냉채에 썰어 띄운 청양고추처럼 알큰 상큼한 카타르시스를 만끽하는 것이다. 걸쭉한 육두문자를 발칸 포 쏘듯 퍼붓고 나면 폐회다.

과연 '이놈의 세상, 욕이라도 실컷 하고 살자'는 충동을 느끼는 것이 욕회 회원들만의 이야기일 것인가. 지금 우리 모두가 가진 자 덜 가진 자 할 것 없이 한바탕 하늘을 향해 육두문자를 퍼붓고 싶은 폭발 직전의 욕회 잠재 회원들일지 모른다. 그만큼 세상이 제정신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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