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幹 숨을 고르다 황악] (10) 직지사 산문에 들다

입력 2012-03-02 16:12:43

선종의 대표적 가람, 일주문 넘어서자 깊은 깨달음의 울림이…

천년고찰 황악산 직지사에도 봄이 오고 있다. 가람 입구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천년고찰 황악산 직지사에도 봄이 오고 있다. 가람 입구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벚나무가 기지개를 켜고 봄기운을 만끽하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대양문, 금강문, 천왕문이 절을 찾는 선객들을 맞는다.
한 불자가 천왕문으로 들어와 사천왕상을 향해 합장하고 있다.
한 불자가 천왕문으로 들어와 사천왕상을 향해 합장하고 있다.
한 여인의 애달픈 사연 서린 금강문.
한 여인의 애달픈 사연 서린 금강문.

불교의 도량을 사찰(寺刹) 또는 절'가람이라고 부른다. 사찰의 어원은 산스크리트 어 '상가람마'(Samgharama)이다. 불교교단을 이루는 비구'비구니'우바새(남자 신도)'우바니(여자 신도) 등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모여 사는 곳이란 뜻이다. '상가람마'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승가람마(僧伽藍摩)로 표기됐다. 이를 줄여 '가람'이라고 불렀다. 사(寺'사찰)는 인도 승려 가섭마(伽葉摩) 일행이 낙양에 들어와 정사(精舍)를 지어 '백마사'(白馬寺)라고 부른 것이 시초이다. 절은 우리나라에서만 불린다. 아도화상이 선산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서 살았는데 '모례'가 우리말로 '털례'로 변하였고 이후 '덜' '절'로 변했다고 한다. 또 사찰에 와서 절을 많이 하기 때문에 절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얘기가 전하지만 정설은 없다고 한다.

◆봄기운으로 더욱 운치를 자랑하는 산사(山寺)

우수가 지나고 경칩이 다가오자 겨울이 이젠 먼 발치로 물러난다. 가끔 꽃샘추위가 심술을 부리지만 이젠 완연한 봄기운이 가까이 다가온 듯하다. 산사를 찾는 아낙네들의 차림새도 한결 밝고 가벼워졌다. 직지사 매표소를 지나 한참을 오르면 만세교(萬歲橋)가 나온다. 황악산에서 발원해 능여'내원계곡을 따라 흘러내린 눈 녹은 물이 직지천으로 흘러들고 있다. 직지천 개울에도 봄이 찾아들고 있다. 햇볕이 드는 양지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개울 옆에는 버들강아지도 자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다리를 건너면 세 갈래 길이 나온다. 가운데 길을 오른다. 수령을 알 수 없는 아름드리 벚나무'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오른쪽 낮은 담장을 두른 곳에 웅장한 규모의 직지사사적비가 먼저 눈에 띈다. 담장 안에는 5개의 비석이 나란히 있다. 문이 잠겨 있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사적비는 거북받침에 용머리를 갖추고 있다. 용머리는 두 마리 용이 서로 마주 보는 모습이 조각돼 있다. 사적비 글은 조종저가 지었고 글씨는 금석학의 대가인 낭선군 이우가 해서체로 썼다. 사명과 창건 내력과 중창 내용 등 17세기에 수십 년의 불사를 마무리하고 사찰의 형세와 정통성을 정립해 안팎에 드러내기 위해 사적비를 제작'건립했다는 설명이다.

◆천 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일주문

10여m를 오르면 직지사의 첫 번째 관문인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은 기둥이 일직선성의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일심(一心)을 의미한다. 신성한 가람에 들기 전에 세속의 번뇌와 부산히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직지사 일주문은 한창 해체를 하고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지금은 겨울 혹한으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이다. '黃岳山 直指寺'(황악산 직지사)라는 현판도 내려놓고 있다. 사적(寺蹟)에 따르면 원래 직지사에는 3문(三門)과 2루(二樓)가 있었다. 첫 번째가 바로 일주문이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친 일주문이다. 천왕문'천불전과 함께 임진왜란 때도 다행히 소실을 면했다고 전한다. 오른쪽 기둥 상단부에 불에 탄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는 것이 문화관광해설사의 얘기다.

'黃岳山 直指寺' 현판 글씨는 글씨로 인해 벼슬을 제수받았던, 정조 때 최고의 명필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의 필체로 유명하다. 두 기둥 중 왼쪽 기둥은 1천 년 묵은 싸리나무, 오른쪽은 1천 년 묵은 칡으로 만들어 세웠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지금까지 전해오는 일주문에 대한 얘기가 사실과 다소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보수를 위해 해체한 기둥 목재의 DNA조사를 한 결과, 알려진 것과 달리 싸리나무도 칡나무도 아닌 느티나무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해 살펴본 바는 숙종(1661~1720) 때인 조선 후기 건물로 확인됐다. 직지사 장명 스님은 "일주문의 건물연대가 전해진 것과 다르게 나와 아쉬움은 있지만 사실을 바로잡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며 "일주문 건축양식을 볼 때 조선 후기 때 건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여인의 사랑과 한이 승화된 금강문

일주문을 지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대양문(大陽門)이 있다. 큰 광명을 상징하기 위해 1990년에 세웠다. 이를 지나면 금강역사를 모신 금강문(金剛門)이 나타난다. 금강역사는 불법의 수호신으로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의 역할을 하며 인왕역사로도 불린다. 문의 왼쪽에는 원래 밀적금강,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의 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불화로 그려져 있다.

이곳 직지사 금강문에는 한 여인의 애달픈 사연이 전해 오고 있다. 옛날에 도를 통하지 못해 바람 따라 떠도는 스님이 있었다. 스님이 경남 합천 어느 마을에 묵었다가 집주인의 마음에 들었다. 길을 떠나려는 운수납자(雲水衲者'머물지 않고 떠돌면서 수행하는 스님)를 한사코 붙잡아 며칠을 묵게 했다. 인연이 모질었던지 집주인의 과년한 딸과 억지 혼인까지 한다. 꿈같은 삼 년 세월이 지나 자식까지 낳았다. 그러나 큰 도를 깨우칠 재목감이었던 스님은 훌훌 속진을 털고 기어코 산사로 들어가 버린다. 부인은 방방곡곡 명산대찰을 헤매고 찾아다니다 직지사에 닿았다. 절 입구에 있는 장개 다리에서 남편의 흔적을 찾고는 몇 날 며칠을 금강문 자리에서 남편을 만나기 위해 기다렸다. 그러나 모든 인연을 끊고 용맹정진하는 스님이 산문을 나설 리 없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아낙은 앉은 자리에서 먹는 법도 잊고 일어서지도 않다가 짚불 사그라지듯 그렇게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 후 매년 부인이 죽은 날이면 직지사 스님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궁리 끝에 그 자리에 사당을 짓고 부인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주었다,

어느 해 고승이 직지사를 찾았다가 사찰 내에 있는 사당을 보고 연유를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고승은 "사당을 헐고 금강문을 지어 금강역사들을 세우도록 하시오"라고 조언해 지금의 금강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속세의 인연을 끊고 수행 정진한 스님과 못다 이룬 여인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가슴에 아련하다.

◆선종의 대표적인 가람 직지사

금강문을 빠져나오면 천왕문이 나타난다. 일주문과 금강문은 유난히 먼 반면, 금강문과 천왕문은 답답하리만큼 가깝다. 바로 여인이 죽은 자리에 금강문이 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느낌이다. 임진왜란 때에도 용케 소실을 면한 천왕문(天王門)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문이다.

문을 들어서면 비파를 든 지국천왕(持國天王)이 동쪽에 서 있고 용과 여의주를 든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서쪽에 있다. 남쪽에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이 보검을 들고 있으며, 북쪽에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이 탑을 들고 서 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사천왕 발 밑에는 사람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밟힌 채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 어떤 악연으로 저렇게 모진 고통 속에 지내야 할까?

천왕문은 수미산 중턱에 있는데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일주문에서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은 후에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공간이다. 중생들이 불이(不二)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한다. "나와 네가 둘이 아니요. 생과 사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세간과 출세간(出世間), 색(色)과 공(空) 등 모두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경지를 천명한다. 그러나 불이는 '하나'를 뜻하는 것도 '같음'을 뜻하지도 않는다. '불이'이기 때문에 하나일 수도 같을 수도 있지만 서로의 개별성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는 평등과 자유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천왕문을 오르면 조그만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얼어붙었던 개울이 녹으면서 졸졸 소리 내어 흐른다. 직지사는 가람의 구조가 선종(禪宗) 사찰 형태를 보이는 대표적인 절이라고 한다. 불국사와는 크게 대비된다. 교종의 대표적인 사찰인 불국사는 백운교, 청운교를 올라 자하문을 지나야만 불국토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얕고 깊은 깨달음을 여러 차례 거쳐야 하는 이치다. 하지만 직지사는 일주문만 들어서면 바로 가람의 모든 전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걸음에 불국토 세계에 들어선다. 이른바 선종의 '돈오돈수'(頓悟頓修), 깨치는 순간 이미 부처가 된 것을 상징적으로 잘 조화롭게 조성한 가람인 것이다.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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