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금붕어와 국회의원

입력 2012-02-29 11:10:28

어린 시절 성적표(생활기록부)를 받아들 때마다 가슴 조마조마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수, 우가 많으면 기분이 좋아져 우쭐댔지만 양, 가가 들어 있으면 부모님한테 혼날 걱정이 앞서 집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빼어나다, 우수하다, 아름답다, 훌륭하다, 옳다'는 의미를 지닌 수우미양가(秀優美良可)에 불편하고도 섬뜩한 진실이 숨어 있음을 최근에야 알았다.

일본 전국시대에 쇼군들은 잘라온 적의 머릿수로 부하들을 평가해 '수우양가' 4등급으로 분류했다. 조선에 왜구 출몰이 심했던 만큼 왜구들이 휘두른 칼날에 희생된 우리 조상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 판정 기준은 일본 교육 현장에서 성적 등급 구분 용도로 사용되다가 문제가 많다는 여론에 따라 1945년 폐지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수우양가에 미(美) 한 글자를 더한 수우미양가 평가 기준이 사용돼왔다. 일본 사무라이들의 사람 목 베기 경쟁에 쓰인 용어가 우리 아이들의 평가 잣대로 수십 년간 사용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교육 현장은 마치 적의 수급을 벨 듯한 극단적 경쟁을 부추긴다. 진학이 최고의 교육 목표가 되어버린 교육현장은 이기주의자들을 양산하고 폭력과 왕따, 자살이 판치는 살벌한 교실을 만들었다.

수우미양가로 상징되는 '서바이벌 모드'에서 공존과 상생, 공감의 지혜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오로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온갖 지식과 요령들이 주입된다. 특히 최고의 명문학교를 나와 선망받는 지위에 오른 소위 지도층 인사들이 보여주는 이기적 행태와 공감 능력 결여에서 수급 베어 주군 앞으로 달려가는 야만을 발견한다.

국내 최고의 명문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승승장구했던 한 정치인의 웃지 못할 쇼가 화제를 낳았다. 그는 특정 정치인과 가족에 대한 잇따른 폭로를 정의로 규정했지만 그것은 스토킹에 가까웠다. 분노하기는 쉬워도 용서하기는 어렵다. 폭로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뒤 상대방이 "용서하고 법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생뚱맞게도 그는 "용서한다는 표현에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노이즈 마케팅으로 대중의 관심 속에 머물고 싶은데 상대해주지 않으니까 상실감이라도 느낀 것일까. 사퇴한다고 해놓고 4'11 총선에 출마한다고 했다. '저격수'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금배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금배지를 달기 위해 저격수 활동이 필요하다"고 들린다.

정치의 계절을 맞아, 금배지를 갈구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보아하니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보다 누리겠다는 심산이 큰 듯하다. 금배지를 달면 특권이 200개나 된다. 본인 월급과 보좌직원을 포함해 연간 5억 원을 받으며 KTX와 항공기를 언제든 공짜로 탈 수 있다. 당선되면 평생 연금을 받고, 당사자가 감옥에 가든 상관없이 자격정지 때까지 세비를 받는다. 그뿐인가. 지역구에 내려가면 눈도장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 권력의 달콤함도 빼놓을 수 없다. 공천권을 사실상 거머쥐고 있는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시장'군수들조차 의원님 세단 도어맨을 자처한다.

금붕어의 기억 지속시간은 3초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금붕어조차도 감정을 가지며 주인이 한동안 안 보이면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자신들의 권력이 유권자들로부터 나온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까먹는 국회의원들을 보면 이들의 기억 능력이 금붕어보다 별반 나을 게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역민의 이익은 안중에 없이 중앙당 해바라기가 되며, 지역 현안에는 꿀 먹은 벙어리이다가도 중앙당의 방침이 내려지면 날치기 법안 처리에 주먹질을 마다않는다. 오죽했으면 국회의원이 '국케이원'(K-1'일본의 격투기 대회이름)이라는 이름으로 조롱받을까.

앞의 폭로 정치인이 다닌 대학의 교수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국회의원 권력이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통각 장애자'에게 주어질 때 어떤 끔찍한 해악을 자아내는지 보여줬다"고. 4'11 총선이 코앞에 다가왔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잘 뽑아야 미래가 있다. 지역감정에 기대거나 특정인이 싫다고 덜 미운 사람을 찍는 식의 투표와는 이제 작별을 고할 때가 왔다. 상식이 있고, 자신의 권력의 원천이 지역민임을 기억하는 이들을 고르고 또 고르자.

김해용/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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