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산 6할 보부상 통해 전라·충청·강원도로

입력 2012-02-29 07:40:50

대한제국 때 설립 상단 '고령상무사'

고령상무사 기념관에 전시된 선생안(先生案) 등 상무사 보부상들의 유품.
고령상무사 기념관에 전시된 선생안(先生案) 등 상무사 보부상들의 유품.

사문진 나루의 대표적인 상단은'고령상무사' 였다. 고령상무사 소속 보부상들이 사문진 나루를 통해 반입한 물산의 4할 정도는 대구시장에서 소비됐고, 나머지 6할은 대구를 중개지로 해서 전라도'충청도'강원도 등 전국 각지로 배분됐다.

고령상무사는 원래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 2월 조칙에 의해 설립된 상인 단체로 행상단인 좌사와 우사, 전을 운영하던 상인, 유기와 망건 등 8가지 품목을 판매하던 상인들을 함께 관할했다.

이중 좌사와 우사는 각각 보상과 부상을 합쳐서 보부상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중앙에는 팔도도접장을 두었으며 각 도와 읍에는 임소를 설치해 도접장과 접장을 두었다. 중앙의 팔도도접장은 한성부에서 임명했고, 도접장과 접장은 해당 지역 사람이 맡았다.

보부상단은 이후 몇 차례 관할 기관이 바뀌며 운영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상회, 상사 등과 함께 상무회의소로 개편됐고, 1899년 상무사가 설립되면서부터 다시 이에 속하게 된다. 상무사는 중앙에는 사장을, 도와 군에는 각각 분사장과 분사무장을, 지역 상무사에는 반수와 접장을 두었으며 사장은 의정부참정이, 분사장은 각 도 관찰사가 맡도록 했다. 고령상무사 우사는 이때 조직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고령상무사 좌사계 설립 초기 우두머리인 반수 직은 오랫동안 유(兪)씨와 박(朴)씨 가문에서 번갈아 맡았다. 조직은 점차 반수-접장-반수공원-본방공원-도공원-별공원- 본소공원-별유사-도집사-문서공원의 위계를 갖추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 일시 혁파돼 1900년까지 활동이 중단됐으나 1901년부터 재가동됐다.

반수와 접장을 포함한 공원의 수는 많을 때는 13, 14명, 적을 때는 2, 3명 정도로 다른 지역의 상단에 비해 상당히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고령상무사 좌사계는 일제의 노골적인 경제 침략으로 갈수록 활동이 위축되면서 지역 시장에서 영향력을 잃게 되었고 1927년에는 길흉상조, 병자구호 등을 계원의 의무로 하는 친목계로 정비되었다. 조직의 규모도 점차 작아져 징용과 징병이 본격화된 1944년 이후로는 반수, 접장, 본방만 선출하는 수준이었다.

고령군은 2008년 4월 고령읍 고아리에 고령지역과 대구의 사문진 나루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조선보부상단의 유업을 기리고, 지역 상인의 삶과 문화를 한자리에 모은 고령상무사기념관을 설립했다.

조선보부상단의 유물과 유품을 전시하고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대제를 지내고 있다. 달성'김성우기자

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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