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톰 롭 스미스의 스릴러 소설 '차일드 44'에는 남편이 아내를 미행하는 내용이 나온다. 스탈린 체제 아래의 소련에서 자행된 국민에 대한 감시와 탄압, 연쇄 살인 사건을 그린 이 소설에서 비밀경찰 MGB(KGB의 전신)의 간부인 주인공이 상부의 명령으로 외국 간첩 혐의를 받는 아내의 뒤를 밟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미행에 나선 주인공은 퇴근하는 아내를 뒤따라 간다.
노련한 첩보원인 주인공은 발각되지 않으면서 시야를 확보하려고 주변 상황에 따라 미행 간격을 조절한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는 20~30m로 거리를 좁히고 덜 혼잡한 지역에서는 50m쯤 거리를 띄운다. 곧게 뻗어 있어 시야 확보가 잘된 곳에서는 먼 간격을 두고 따라가지만, 지하철 역으로 이어지는 계단이나 플랫폼, 꺾어지는 모퉁이가 많은 곳에서는 거리를 좁혀 따라붙는다. 그는 첩보원의 기본 능력인 미행 기술을 뛰어나게 발휘해 아내의 행적을 쫓는 데 성공한다.
첩보 소설과 영화로 접했던 미행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CJ그룹이 이재현 회장을 미행했다며 폐쇄회로 화면 자료 등을 공개하면서 삼성물산의 한 직원을 업무 방해 혐의로 고소한 사건이 그것이다. 이번 미행 의혹 사건은 범삼성가인 이재현 회장의 아버지 이맹희 씨가 동생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상대로 유산 상속 관련 소송을 제기한 것과 맞물려 세인의 관심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삼성의 미행 의혹은 이번만이 아니다. 노조를 허용하지 않는 삼성이 노조 설립을 추진하는 직원의 뒤를 밟고 감시했다는 논란이 과거에도 있었다.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다는 삼성이 이처럼 음습한 의혹을 받는 것은 대기업이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기업이 통상적인 활동 외에 이해관계를 위해 개인을 감시하고 미행한다면 두려움을 자아내는 '괴물'이 되는 것이다.
삼성은 국내 대표적 재벌이자 세계적인 일류 기업이다. 그러나 최첨단 제품을 만들면서도 후진적 기업 지배 구조와 가족 경영 체제 때문에 국내외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삼성을 포함해 하도급 기업들을 옥죄고 골목 상권을 침해하는 재벌들에 대한 개혁 여론이 일고 있기도 하다. 두 얼굴의 이미지를 지닌 삼성이 미행 의혹까지 일으키는 것은 재벌의 어두운 현실을 상기시킨다.
김지석 논설위원 jise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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