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그리운 서당(書堂)

입력 2012-02-22 07:58:57

서당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에 서재류(書齋類)와 향교(鄕校)로 이어지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서원(書院)과 서당으로 분리되면서 아동교육의 산실로 본격화되었다.

훈장을 중심으로 전인교육이 이루어진 서당의 상징은 회초리(楚撻)였다. 몇 달간 아이가 초달을 맞지 않으면 부모님이 서당을 찾아가서 섭섭함을 하소연했다. 고운 자식 매 하나 더 주고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 행여 훈장님이 자기 자식을 편애하여 떡을 하나 더 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삼십절초(三十折楚), 오십절초(五十折楚)의 문장은 회초리가 남긴 문장이다. 서른 개나 쉰 개의 회초리가 부러지도록 맞지 않고선 짓지 못할 문장이란 뜻이다.

아이를 대신해서 훈장이 접장에게 회초리를 맞거나 부모가 대신해서 회초리를 맞는 경우는 조선시대 서당에서 흔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정신을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당연히 지켰다.

가정교육도 서당교육 못지않게 엄격했다. 회초리를 잡는 쪽은 주로 어머니였다. 이율곡, 한석봉, 김만중을 위시한 조선의 선비들이 엄한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으면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세계적인 교육학자 중에서 한국의 서당교육이 인류가 창조한 가장 우수한 교육제도라고 칭찬하는 것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님을 우리들은 인정한다.

오늘날 교육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정착되었다. 일제는 서당규칙을 공포하여 당시 1만6천여 개에 달하던 서당을 삼분의 일로 축소시켜 보통학교에 편입시켰다. 교육 수혜자 측면에서 보면 역기능만 있는 게 아니고 순기능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나라 학교와 교실. 회초리를 든 교사는 학부모의 손찌검이나 공갈협박을 각오해야 한다. 심할 경우 인터넷에 동영상이 떠다니며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것은 기본이다. 갖은 욕설이 난무하는 비방댓글과 씨름해야 하고 심지어 형사처벌을 받을 준비까지 해야 한다.

떡만 먹는 아이들은 공중목욕탕이 풀장이고, 대중식당이 놀이터다. 학교가 비싼 옷과 용돈을 마련하는 창구고, 순진한 급우는 분풀이 대상인 동네북이다.

이런 아이들의 부모는 교사의 훈계를 기를 죽이는 행위로 보고 도끼눈을 치뜬 채 교사에게 달려든다. 패륜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자식에게 맞으면서 사는 늙은 부모가 미래의 자신임을 깨닫지 못한 죗값을 톡톡히 받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내 자식이건 남의 자식이건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소중한 자식의 교육은 성숙하기 전까지 떡을 주기보다는 회초리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정재용/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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