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宅은 살아있다] <7>영덕 창수면 인량리 마을

입력 2012-02-15 07:55:53

학의 날개 감싸인 배산임수 남향지 세도가 몰린 영남 대표적 양반마을

재령 이씨 입향조인 통정공 이애 선생이 지은 충효당. 최근 부분 복원공사를 끝냈지만 대청마루 천장은 건축 당시 원형대로 서까래 위에 산자만 엮은 채 흙을 바르는 앙토 마감은 하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다. 이는 인간이 미완성의 존재이듯 이애 선생이 미완성 건축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 였다고 전해온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재령 이씨 입향조인 통정공 이애 선생이 지은 충효당. 최근 부분 복원공사를 끝냈지만 대청마루 천장은 건축 당시 원형대로 서까래 위에 산자만 엮은 채 흙을 바르는 앙토 마감은 하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다. 이는 인간이 미완성의 존재이듯 이애 선생이 미완성 건축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 였다고 전해온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농암 이현보의 아들 이중량의 종택인 삼벽당. 빈집이었던 이곳에 5년전 귀농한 가족이 외양간을 세면장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삼벽당을 비롯해 4곳에서는 한옥 체험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농암 이현보의 아들 이중량의 종택인 삼벽당. 빈집이었던 이곳에 5년전 귀농한 가족이 외양간을 세면장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삼벽당을 비롯해 4곳에서는 한옥 체험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충효당 뒷편 사당 앞을 지키고 있는 회나무. 오른쪽 가지는 출향 후손, 외쪽 가지는 지방 후손의 성쇠를 상징한다는 속설로 제사때는 제물을 항상 가지 중간으로 옮긴다고 한다.
충효당 뒷편 사당 앞을 지키고 있는 회나무. 오른쪽 가지는 출향 후손, 외쪽 가지는 지방 후손의 성쇠를 상징한다는 속설로 제사때는 제물을 항상 가지 중간으로 옮긴다고 한다.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조선시대 수많은 인재가 배출된 영남의 대표적인 양반 마을이다. 예주(禮州) 사림의 본거지이자 영해부 5대 성(姓) 8대 종가(宗家)가 자리 잡은 곳이다.

곡창지대를 기반으로 풍수지리학적 명당에 위치하고, 지역 학문의 중심이었던 인량리는 수백년간 명문 양반가로서 번성을 누려왔다. 하지만 과거의 명성만큼 현재 인량리를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월이 바뀌면서 세상의 중심이 바뀐 탓일까.

◆인량리는 어떤 곳인가

대구-포항고속도로 종착지인 포항IC에서 울진 방면 7번 국도를 따라 올라오다 영덕읍을 지난 후 고래불해수욕장 입구 직전 송천교차로에서 영양 방향으로 좌회전해 3㎞가량 달리면 인량리가 나타난다.

과거 영해부에 속했던 인량리의 역사는 삼한시대부터 시작된다. 일설에 의하면 삼한시대 우시국(于尸國)이란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현재 인량리 일대가 그 도읍지라고 한다. 그런 연유로 한때 인량리가 나라골 또는 국동(國洞)으로 불리기도 했고, 이 마을 출신 삼보컴퓨터 이용태 회장이 1992년 나래이동통신이라는 회사를 창업하기도 했다.

옛날 영덕 영해(인량리)와 포항 흥해, 울진 평해 등 3해(海)가 경북 동해안 최대 곡창지대이다 보니 인량리에는 자연스레 사람들이 몰려 살기 시작했다. 특히 학의 날개가 마을을 품은 듯하고, 배산임수 형태의 남향에 위치해 있어 과거 세도가들은 영해부에서도 최고 명당인 인량리에 앞다투어 뿌리를 내렸다는 것.

고려 말 최대 번성기를 맞았던 인량리에는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대흥 백씨와 재령 이씨, 안동 권씨, 야성 정씨, 무안 박씨, 영양 남씨, 영천 이씨, 신안 주씨 등이 자리 잡았다. 이때부터 충효당(운악 이함의 종택)과 오봉종택(오봉 권책의 종택), 용암종택(용암 김익중이 살았던 집), 갈암종택(갈암 이현일의 종택), 우계종택(우계 이시형의 종택), 소호종택(소호 박신지의 종택)이 들어섰다. 또 삼벽당(이중량의 종택), 원모재(함양 박종산의 종택), 자운정(석계 이시명이 살림을 낸 집), 처인당(영양 남씨 남달만의 집), 강파헌정침(숙종 때 청백리 권상임이 지은 집) 등도 자리를 잡아 현재까지 세월의 무게를 이기고 있다.

이렇게 수천년간 번성했던 인량리는 현대화 과정에서 그 세가 많이 위축됐으나, 여전히 석'박사 배출 마을로 유명하다. 최근 40년간 주민 수가 1천여 명에 불과했으나 석'박사 30여 명을 배출했다. 현재는 130여 가구 300여 명이 살고 있으며 성공한 출향인사들이 종택 보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재령 이씨 종택, 충효당(忠孝堂)과 우계종택(愚溪宗宅).

중요민속자료 168호로 조선 연산군 때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효당은 통정공 이애 선생이 짓고, 이황 선생의 성리학을 계승'발전시킨 이현일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지금 있는 충효당(사랑채)은 그후 뒤쪽으로 옮긴 것인데, 운악 이함 선생이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602년에 건립했다는 것. 이 건축물은 안채와 사랑채, 마구간, 사당, 정자 등이 넓은 대지 위에 남향으로 자리 잡았고, 후원에는 상당히 넓은 대밭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어우러져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ㄱ자형 안채와 ㄴ자 사랑채가 마주 놓여 있는데 사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구분하고 높은 기단 위에 후학을 위한 교육장으로 이용된 충효당이 있다. 이곳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을 고루 갖춘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집이다.

최근 부분 복원공사를 끝냈지만 대청마루 천장은 건축 당시 원형대로 서까래 위에 산자만 엮은 채 흙을 바르는 앙토마감은 하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다. 이는 인간이 미완성의 존재이듯 이애 선생이 미완성 건축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온다.

충효당의 사당에는 신기한 나무가 한 그루 있어 눈길을 끈다. 밖에서 사당 대문 안쪽을 바라봤을 때 대문 중앙을 중심으로 나무의 큰 가지가 좌우로 뻗어 있다. 좌측 가지는 서울 등 출향 후손들을, 우측 가지는 지방의 후손을 상징하는 것인데 가지의 강건함이 바로 그 후손들의 성쇠 여부를 알려준다는 것. 그래서 지금도 재령 이씨들은 '제사 때 제물을 한쪽 나뭇가지 방향으로 옮기면 다른 쪽 후손이 어려워진다'고 우려해 제물은 항상 나뭇가지 중간으로만 옮긴다고 한다.

충효당의 작은 집인 우계종택(경북도문화재 307호)은 이애의 손자 운악 이함의 둘째 아들 우계 이시형의 살림집으로, 1607년(선조 40)에 건립됐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전형적인 ㅁ자형으로 지은 기와집인 우계종택은 막돌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추를 놓고 사각으로 된 기둥을 세운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이다.

재령 이씨는 조선시대 당시 특히 흉년이 들면 도토리묵을 쑤어 인근에서 형편이 어려운 서민들을 먹여 살리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계종택의 종부 김기섭(65) 씨는 13대조 할머니가 남편을 잃은 후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해 나라로부터 열녀문을 하사받았다고 했다.

◆세조의 핍박을 피해 입향한 안동 권씨 오봉종택(五峯宗宅)

조선 초 세조 때 단종 복위를 꾀하다 화를 입고 낙향한 안동 권씨 오봉 권책 선생의 종택이다. 당시 13세 나이로 참형을 면한 오봉 선생은 걸어서 영해로 유배됐다. 이후 평생을 종택 뒷벽 왕암 바위에 올라 단종을 그리며 분향과 울음으로 유명하고, 자손들에게도 관직에 나서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대구의 태왕건설 권성기 전 회장이 오봉 선생의 자손이다.

오봉종택은 원래 인량1리에 위치했으나 18세기 초쯤 화재 후 인량2리로 옮겨졌으나 후손들이 정성스레 관리한 덕택에 현재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마을 중앙에 위치해 남동향으로 자리 잡은 오봉종택은 안채와 오봉헌(五峯軒), 벽산정(碧山亭), 사당, 솟을대문 및 관리사로 구성돼 있다. 안채의 평면 구성은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안채 전면은 우측으로부터 정지, 외양간, 중문간, 사랑방, 그리고 사랑방 좌측에 마루방이 있다.

오봉헌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으로, 평면 구성으로는 전면에 3통간의 툇간을 설치했고 후면에는 2통간의 마루방과 4통간의 온돌방이 있다. 벽산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돼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이고, 상부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삼벽당(三碧堂)

70세 때 90대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춘 일화로 유명한 농암 이현보의 아들로 조선 중기 영해 부사였던 이중량의 종택이다.

삼벽당은 '세 가지 푸름'을 뜻한다. 껍질까지 푸른색을 띠어 그 옛날 봉황이 찾아드는 나무로 여겨진 별채 옆 벽오동와 뒷산의 소나무, 대나무 등을 상징해 지어진 이름이다. 당시 지조와 절개를 지켰던 선비들의 정신을 나타내고자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경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2호로, 남향으로 위치한 삼벽당은 사당과 우측에 ㅁ자형 본체, 마동댁이 일렬로 나열돼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5칸 반이고, 중문간 좌측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사랑채가 위치해 있다.

특징은 본체 대청의 배면 창호에 설주 홈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고, 몸체 우측 익랑의 문얼굴에서도 고식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각 기둥에도 민흘림 처리가 돼 있는 등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숙박지와 인근 관광지, 식당.

폐교를 리모델링한 나라골 보리말 체험학교에서 숙박을 할 수 있고, 한옥 체험을 원한다면 삼벽당과 오봉종택, 원모제, 우계종택을 방문하면 된다. 신청은 모두 체험학교를 통해 가능하다. 054)734-0301. www.narabori.go2vil.org

명사 20리의 고래불해수욕장이 5분 거리이고, 나옹왕사 사적비, 장육사, 창수령이 인근에 있다.

전통음식은 무엇보다 메밀묵으로, 메밀묵밥'수제비'부침'떡국 등을 창수면 소재지에 위치한 현대, 중앙식당에서 맛볼 수 있다.

영덕'박진홍기자 pj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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