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외길을 달렸다. '1등'도 해봤고 '세계 최초'로 IT제품 개발도 해냈고 어려운 시절도 겪었다. 업계 내에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선두주자의 자리도 굳혔다.
그 사이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터폰과 도어폰은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흑백 비디오폰으로 진화했고 이어 컬러 비디오폰 시대로 진전된 데 이어 집안의 자동화기기를 모두 제어할 수 있는 홈네트워크 및 보안시스템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디지털 홈네트워크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코콤의 고성욱 대표( )를 서울 강서구 코콤 사옥에서 만났다.
고 사장이 정보통신기기를 생산하는 코콤을 설립하게 된 것은 1976년이었다. 인터폰을 제조하던 일본계 제조회사에서 일하던 고 사장은 경쟁업체에 스카우트됐다가 부도가 나자 떠맡다시피 해서 경기도 부천에서 회사를 차렸다. 어쩔 수 없이 떠맡았지만 당시 인터폰 시장은 강남개발붐과 더불어 고속성장하고 있었다. 개발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2년 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연구원들도 일본의 전자회사에 연수를 보내는 등 신제품개발에 주력했다.
그 결과가 세계 두 번째로 개발한 '비디오 도어폰'이었다. 80년대 초반, 고 사장은 목소리로만 확인하던 인터폰시대를 얼굴을 대면하는 비디오폰 시대로 전환시켰다. 비디오 도어폰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끌면서 회사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당시 일본과 이태리의 한두 개 기업 외에는 코콤의 경쟁상대가 없었다.
지금도 10년 이상 된 아파트의 인터폰은 '한국통신' 제품이 대부분이다. 당시 국내 아파트 시장에서의 인터폰은 한국통신 제품이 휩쓸었다. 한국통신은 코콤의 옛 사명으로 2001년 코콤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시장이 급성장하자 대기업들이 뛰어들었다. 국내 30대 대기업군에 속하는 10여 개 기업이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대기업이 대거 시장에 진입, 코콤과 경쟁하게 되면서 성장세는 둔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업계 선두자리는 내주지 않았다.
욕심이 생겼다. 사업다각화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1994년 국내 최초로 디지털 컬러 CCTV용 카메라 모듈을 개발한 데 이어 1996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내놓고 디지털 카메라 시장을 열었다. 60여 명에 이르던 연구원의 절반을 디지털 카메라 개발 쪽으로 돌렸다. 1, 2년 사이에 디카시장이 급성장하는 추세를 보이자 일본에서 소니와 캐논, 니콘 등 10여 개 기업들이 디카시장에 진출했다. 국내에서도 대기업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기업의 경쟁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4년여 만에 디지털 카메라 사업을 접었다.
"시장이 중소기업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하니까 대기업들이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중소기업인 저희들은 경쟁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 사이 도어폰 시장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면서 중국기업들이 저가공세를 통해 코콤의 시장을 흡수하는 등 시장분위기가 변화돼 있었다.
그는 "도어폰시장은 중소기업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인데도 대기업이 너도나도 뛰어들었다가 대부분 철수했고 지금은 2, 3개 대기업이 코콤과 시장을 삼등분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하면서 대기업의 기업윤리를 지적했다.
전문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중견 중소기업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정부의 획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았다. 대기업은 대기업이 더 잘할 수 있는 사업을 해야 하는데 돈이 된다고 마구 뛰어들면서 중소기업이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다.
고 사장은 "당시 디지털 카메라시장에 진출하는 '외도'를 하지 않았더라면 비디오폰과 홈네트워킹 사업에서의 점유율도 크게 확대될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수년 전부터 주택건설시장이 위축되자 코콤은 LED 사업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LED 전구 제조는 디카와는 달리 주택건설에 필요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고 사장은 안정적인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자연을 담은 친환경, 초절전 장수형' LED가 코콤이 내세우는 다른 업체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 코콤은 이제 국내에서 디지털 홈네트워킹 구축에 주력하고 있다. 물론 해외 부문 매출도 만만찮다.
그는 초중고 등 청소년기를 고향인 문경시 산양면에서 보냈다. 산양초교에 이어 문경중'고를 다닐 땐 매일 20리 산길을 걸어다녔다. "비가 올 때는 다리를 건널 수 없어 1, 2㎞를 더 걸어서 등교하면 1교시 수업이 끝나있곤 했다"며 문경을 떠올렸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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