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문학 소년, 매일같이 이상화 詩碑 옆에서 놀다
'나의 살던 고향'은 내 가슴에 시의 불을 지피고 가는 고향이다. 대구시 중구 삼덕동 1가 41번지에서 태어나 어쩌면 아버지, 할아버지의 원적(原籍)이었던 경남 사천, 사천 앞바다의 바다를 껴안고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하나의 목숨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본다.
설익은 햇살이 따라오고/젖빛 젖은 파도는/ 눈물인들 씻기워 간다.
나의 시 '바다에 누워'의 앞부분 몇 행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대구 중구 삼덕동 1가 41번지, 지금은 대구의 번화한 젊음의 거리로 변화되어 커피점, 옷가게들로 젊음의 골목길, 젊음의 거리로 활력이 넘치는 곳이다.
옛날 1950년대, 60년대는 조용하고 한산한 거리, 대구형무소가 부근에 위치해 있었고 중앙초교를 가는 길목에 2군사령부의 깃발이 보이고 정문에 헌병들이 보초를 선 모습들이 보였으며 우리네 집 앞에는 경북대학교 총장 고병관 박사의 집이 있었다.
긴 골목 숨바꼭질 사다리, 가이세이, 마때, 일본식 이름의 댄지 병정놀이 구슬치기 딱지놀이, 땔감은 장작을 평수로 재어 놓고 겨울나기를 힘겨워 하였다. 겨울의 눈이 거의 폭설에 가까운지라 대구형무소에 눈 굴을 만들어 눈 속에서 아이들의 놀이터로 뛰놀았던 일들이 눈에 선연하다.
무시무시한 강도 '강오원' 사건으로 으스스하던 대구형무소 이야기, 탈출해 감옥소 '담벼락에 큰 발자국을 남겨 놓았다더라'는 등 카더라 방송은 유년 시절 1957년 무렵에도 횡행했다.
중앙초교와 동덕초교가 나누어지던 일, 학교 담벼락 아래 천막교실 옥수수죽, 원족(소풍)가는 일, 무태 사과밭을 지나갔던 먼 길, 아까시나무 탱자가시나무, 여학생 고무줄 자르던 일, 가을 운동회 봄 운동회, 등나무 밑 미끄럼틀, 부엉이 눈 껌벅거리는 동산, 식물원, 온실, 지금은 2'28기념중앙공원으로 변하여 대구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중앙초등학교. 초등학교 야구전 응원 "중앙, 중앙 거지 떼들아" 라는 비하된 응원의 노래와 야유 등, 칠성 종합운동장 야구 경기의 모습이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꽃밭들이었다. 범어동 논둑을 지나며 메뚜기 잡던 일 대봉동 누에공장을 가며 뽕잎과 누에를 매만지던 일, 식물채집, 곤충채집을 하러 고산골 다니던 일들, 대구초교 다니던 이재행과의 만남, 일본식 이마사카 빵집의 나마가시, 옛날 경북학원 자리의 막걸리 집 땅에 독을 박아놓고 어른 심부름 다녔던 일들….
아버지는 당시 국제시장(양키시장) 안 대구에서 최초인 양식 국일 그릴을 하셨다. 돈도 잘 벌고 하셨는데 보증을 잘 못 서 대구 중구 삼덕동 1가 41번지 집 두 채를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현실 세속 일을 아버지 마음같이 생각하시며 후회하시고 고민하시던 모습, 6'25 직후의 사회혼란상과 함께 가난을 지고 가는 짐이 되었으리라.
대구 달성공원예식장 단군성조 숭봉회의 관리 일을 맡은 아버지는 옛날 일본 경도상업전문을 졸업하시고 어머니는 신명고보를 나오셨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만주 '자무스' 전력과장으로 계셨다가 대구로 오셔서 숱한 고난과 고초를 겪으셨다. 여덟 남매의 가장(家長)으로 무거운 삶의 애환의 짐을 지고 살아오셨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는 지금 대봉동 청운맨션(당시 경북고등)앞 대구제일예식장(식물원) 피로연회장을 하셨는데 신부대기실에 잠깐 계시다가 느닷없이 2층 예식장이 무너지는 큰 사고로 갈비뼈와 다리가 부러져 중태에 이르셨다. 대구적십자병원에 석 달간 입원을 하셨는데 다행히 나으시고 그 후로는 제일예식장을 그만두셨다
제일예식장 옆에는 한솔 이효상 선생, 양호민 선생이 살고 계셨는데 한솔 선생은 공병 대위로 있던 삼촌의 결혼 주례를 하셨다. 아버지는 몇 달 뒤 퇴원하시고 달성공원예식장 피로연회장을 하셨다.
1960년대 중고교 시절 특히 대륜고등 재학 중에는 매일 이상화 시비 곁에서 놀았다. 고(故) 이재행, 정호승 등 전국의 고교 문예콩쿠르 입상자들은 대구경북의 문학행사 백일장을 하고 나면 넓고 넓은 달성공원 기와집 지금 이팝나무가 서 있는 어린이 헌장비, 서병오 선생 비석이 있는 500, 600평의 집이 우리네 젊은 청춘의 문학 마당이었다. 그 당시 철부지 소년들, '학원문학상' 출신들, 한국학생시우회, 포물선, '학애 문학'동인 대구 문우회 등이 얽어지기도 했다.
1966년 경북대학 뒷담에 가로(街路) 시화전, 대구방송국 KG홀 문학의 밤, YMCA 시화전, 미문화원 시화전, 곳곳에 까까머리 소년, 단발머리 소녀들이 교복을 입고 문학에 열정을 토하고 울분을 토해내는 10대들 우리들 모습이었다.
대륜고에 입학하여 전국 문예 콩쿠르 입상 등 문학 열병을 치를 때였다. 시인 '정호승 연구'의 글 앞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정호승 시인 그가 입학한 대륜 고등학교는 이상화, 이육사 등 한국 시 문학사를 빛낸 시인들이 나온 곳이었다. 그곳에 진학한 정호승은 매일 아침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나오는 보리밭을 매일 걸어 다녔다. 어쩌면 이 보리밭을 오가며 그는 시인이 될 꿈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당시 대구 달성공원 내 관리소 건물에는 대륜고등학교 문예반 2년 선배인 박해수 형이 살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시집을 낸 문재였다. 정호승은 시를 써들고 툭하면 그를 찾아갔다. 그는 꼭 상화 시비가 있는 숲으로 정호승을 데려가 그의 시를 평해주곤 했다."
스무 살 넘어 잠깐 군에 입대 ROTC 소위로 임관하여 서부전선 개성 송악산 아래 GOP 2년4개월을 떠나곤 거의 대구를 떠난 적이 없는(아, 잠시 경주에서 교사생활 3년을 한 적이 있다) 내 고향 대구, 대구의 분지를 아끼고 사랑한다.
1974년 제1회 한국문학 신인상에 당선된 '바다에 누워'는 대구 중구 중동 옥탑방에서 붉은 200자 원고지 넉 장에 담긴 쓴 시로 김동리 선생 발행인인 '한국문학'지에 발표된 것이었다.
고향은 떠나오면 아쉽고 곁에 있으면 무심한 것일까? 한 번쯤 살던 곳을 가보고 옛날 흔적마저 지워져 버리고 없는 도시의 빠른 세월의 풍속도는 이제 지나온 여인숙처럼 지워지고 없다.
중학교 시절 읽고 외던 이탈리아의 시인 '과시모도'처럼 "누구나 지축(地軸) 위에 호올로 서 있나니, 햇살 한줄기 뻗혔는가 하면 황혼이 깃든다" 라고 쓴 시 구절같이 고향은 변하고 바뀌어도 한 번도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 태연자약(泰然自若)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대구 중구 삼덕동, 중구 달성동, 수성구 파동, 수성구 만촌동, 수성구 두산동으로 이어져 왔다. 지금은 수성못을 껴안고 있는 두산동 두산서재에서 휘어진 풀들과 수면에 비치는 청둥 오리, 거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의 살던 고향을 회억(回憶) 하는 일은 영혼과 세상을 연결하는 삶에 지친 사람과 무언의 대화, 영혼의 길, 한 방울의 눈물 같은 것이 아닐까. 기도하는 비둘기가 눈물을 적시고 날아가는 세월의 연초록 이파리들이 파르르 고향의 언덕과 수성못을 넘어 날아가고 있다.
박해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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