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5위 원전 대국의 불편의 진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모든 것을 무디게 만드는 시간의 힘 때문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벌써 10개월이 지났다. 방사능 오염 피해를 우려하며 법석을 떨던 분위기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원전 사고에 따른 방사능 오염 우려는 종식된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졌을 뿐이다.
최근 국내에서 원전 고장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분위기는 무관심할 정도로 냉담하다. 일본처럼 방사능이 유출되는 사고를 당하지 않은 까닭인지, 먹고살기 바빠 다른 곳에는 관심을 둘 여유가 없는 탓인지 모르겠지만 원전 고장 사고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안전 불감증이 우려될 정도다. 잦은 고장으로 안전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을 계기로 국내 원전을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을 짚어봤다.
◆원전 고장 해마다 10여 차례 이상 발생
이달 12일 월성원전 1호기가 냉각재 펌프 온도측정기 고장으로 가동이 중단됐다. 지난달 13일에는 울진원전 1호기가 냉각장치 기능 저하로 운전을 정지한 데 이어 14일에는 고리원전 3호기가 발전 터빈 전압 이상으로 가동을 멈췄다. 또 지난해 10월 11일에는 울진원전 6호기가 예방정비를 마치고 발전을 재개한 지 4개월도 안 돼 고장을 일으켰으며, 이보다 앞선 6월 21일에는 고리원전 2호기가 송전선로 관련 고장으로 발전을 멈췄다.
원전 고장 사고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매년 10여 차례 이상 발생하고 있어 원전 고장이 너무 잦다는 우려감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해 3월 한국수력원자력이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소속 민주당 노영민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서 원전이 첫 가동된 1978년부터 지난해 초까지 427건의 원전 고장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 해 평균 13건에 이르는 고장이 발생한 셈이다.
원전별 고장 건수를 보면 울진원전(1~6호기)이 39건으로 가장 많았고 영광원전(1~6호기) 25건, 고리원전(1~4호기) 14건, 월성원전(1~4호기) 11건 등이 뒤를 이었다. 특히 2008년에 방사능 누출 경보기가 작동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던 영광원전 5호기의 경우 지난해 증기 발생기 고장, 원자로 냉각재 펌프 정지에 따른 원자로 정지 등 2차례 고장을 일으켰다.
◆전력예비율에 묻힌 불편한 진실
최근 원전이 고장으로 가동을 멈출 때마다 전면에 등장하는 이슈는 안전 문제가 아니라 전력예비율이다. 지난달 울진원전 1호기와 고리원전 3호기가 잇따라 고장을 일으켰을 때 전력예비율이 올겨울 들어 최저인 8%대로 떨어졌다는 소식이 안전문제보다 더 부각됐다. 이는 원전이 고장으로 멈춰설 때마다 정부가 전력 수급 불안을 강조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국민들도 안전 문제보다 전력예비율을 더 걱정하는 분위기다. 경험하지 못한 원전 사고보다 지난해 9월 경험한 블랙아웃(정전)이 더 큰 우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전력예비율 속에 안전 문제라는 원전 고장 사고의 본질이 묻혀 있음을 알 수 있다. 회사원 이성우(43) 씨는 "전력예비율은 원전 고장 사고의 부차적 문제다. 본질은 왜 고장이 났는지, 정부 발표대로 정말 안전에는 문제가 없는지 등을 의혹 없이 규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전이 고장을 일으킬 때마다 안전 문제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고 있다. 정부가 안전 문제에 대한 국민적 우려를 희석시키기 위해 전력예비율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고 말했다.
◆만일 방사능 유출 사고가 일어난다면
한국은 세계 5위의 원전 대국이다. 지난해 3월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가동 중인 원전은 총 443기다. 이 가운데 미국이 104기로 가장 많은 원전을 보유하고 있으며 프랑스(58기), 일본(55기), 러시아(32기), 한국(21기)이 뒤를 잇고 있다. 하지만 국토 면적을 고려하면 한국의 원전 위상(?)은 더욱 높아진다. 미국'프랑스'일본'러시아에 비해 국토가 터무니없이 작은 우리나라의 경우 국토 면적 대비 원전 수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좁은 국토는 원전 사고가 발생할 경우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남한의 동서 길이는 평균 300㎞에 불과하며 남북 길이도 길어야 500㎞ 남짓이다. 원전이 7번 국도를 따라 해안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방사능 누출 등의 원전 사고가 발생할 경우 동서 반경이 좁아 전 국토가 방사능에 오염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후쿠시마 원전에서 나온 방사성 물질이 300㎞ 떨어진 수도권까지 오염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도쿄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가나마치 정수장 흙에서 방사성 물질이 기준치 이상 검출되었으며 도쿄 남쪽 가나가와현에서 수확된 찻잎에서도 기준을 넘는 세슘이 검출돼 일본을 방사능 공포로 몰아넣었다.
◆역주행하고 있는 한국의 원전 정책
환경운동연합에 따르면 전 세계 폐쇄 원전 수는 130여 개에 이르며 폐쇄 원전의 평균 수명은 23년이다. 특별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설계수명 30~40년의 원전도 완공 후 23~25년 사이에 폐기하는 것이 세계적인 기준이라는 것. 하지만 국내에서는 20년 이상 노후된 원전 9기(전체 원전의 43%)가 활발히 가동되고 있으며 설계 수명을 다한 원전에 대해서도 연장 운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 연장 가동을 한 원전에서 잇따라 고장이 발생하면서 안전성 논란까지 불거지고 있다.
국내 원전의 효시인 고리원전 1호기는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해 2007년 설계 수명이 끝났지만 정부는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10년 연장 운행을 승인해 주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고장이 발생하면서 안전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올해 30년 설계 수명이 다하는 월성원전 1호기도 가동 연한을 10년 연장하기 위해 가동을 멈추고 대대적인 설비 교체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재가동 6개월 만에 고장으로 멈춰 섰다. 이에 따라 경주지역 시민단체들이 월성원전 1호기 수명 연장 중단을 촉구하고 나선 가운데 경주시의회도 이달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월성원전 1호기의 수명연장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등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2050년까지 점차적으로 원전을 폐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또 후쿠시마 사태 이후 독일이 1980년 이전에 건설한 노후 원전 7기의 가동을 잠정 중단하는 등 유럽의 분위기는 탈핵(脫核)으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원전 추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 건설 중이거나 시운전에 들어간 원전과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원전은 신고리 2'3'4'5'6호기, 신월성 1'2호기, 신울진 1'2호기 등 9개에 이른다.
이에 대해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지난달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에 발표된 제4차 원자력진흥종합계획을 보면 사고 이전보다 핵 산업이 더욱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원전정책은 역주행으로도 모자라 과속주행까지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또 그는 "다양한 매체에 찬핵(贊核)에 대한 광고가 실리고 핵발전소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까지 제작되는 등 그동안 국민은 찬핵의 논리에 일방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반면 핵발전소, 핵폐기장에 대한 반대 운동은 모두 지역 이기주의로 설명되었다"며 한국의 핵발전 정책을 비판했다.
◆원전 정책 근본적인 재검토 필요
원전 사고는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다. 1986년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발생한 체르노빌은 현재까지 높은 방사능으로 인해 사람이 살지 못하는 유령 도시로 남아 있다. 사고 발생 26년이 지났지만 원전 사고로 43만여 명이 암과 기형아 출산 등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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