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랑] '온몸에 화상' 아들 돌보는 한해진 씨

입력 2012-01-18 10:42:50

"생사의 고비 넘나드는 아들아, 가난해서 미안해"

외동아들로 열심히 사회생활을 해왔던 재희 씨가 전신에 중화상을 입고 생사를 넘나들며 치료를 받고 있지만 수천만원에 이르는 치료비는 감당할 여력이 없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외동아들로 열심히 사회생활을 해왔던 재희 씨가 전신에 중화상을 입고 생사를 넘나들며 치료를 받고 있지만 수천만원에 이르는 치료비는 감당할 여력이 없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재희야, 내년에 아빠가 환갑인데 니가 축하해줘야재. 어서 일어나그라. 재희야."

아들은 아버지가 불러도 말이 없다. 아버지 한해진(가명'59) 씨가 몸을 낮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자 재희(28) 씨가 힘겹게 눈을 꾹 감았다. '알았어요. 아버지.'

4일 전 의식을 되찾은 재희 씨는 아버지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힘들게 소통했다. 재희 씨는 사고로 가슴을 제외한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있다.

◆"재희야, 일어나라"

17일 오후 대구의 남구 대명동의 한 병원 중환자실. 재희 씨를 바라보는 한 씨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에 온 지 벌써 35일째, 온몸에 큰 화상을 입은 재희 씨는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말 병원에서는 보름 넘게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한 씨는 포기할 수 없었다. 외동아들인 재희 씨는 한 씨 부부의 유일한 희망이자 전부였다. 그랬던 아들이 며칠 전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전날엔 물을 한 모금 마시기도 했다.

재희 씨가 사고를 당한 것은 지난해 12월 12일 오후 2시쯤이었다. 친구가 운영하는 세차장에서 일했던 재희 씨는 그날도 어김없이 차에 광택을 내고 있었다. 자동차 얼룩을 닦아낼 때 시너와 휘발유를 사용했는데 그가 시너를 옮기면서 정전기가 발생했고 갑자기 불이 났다. "으악!" 시너에서 생긴 불은 곧장 그의 몸에 옮겨 붙었고 불에 휩싸인 재희 씨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뒹굴었다.

"아버님, 재희가…. 사고를 당했어요." 한 씨는 전화로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상황은 심각했다. 아들의 피부에 불에 탄 옷이 박혀 있었고 재희 씨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재희 씨는 피부에 박힌 옷을 제거하고, 목에 구멍을 내 인공호흡기를 달고, 한 달 만에 다섯 번의 수술을 받았다.

◆부부의 간절한 기도

한 씨는 아들에게 미안한 아버지였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아들에게 좋은 것을 해주지 못했다. 건설 현장에서 일했던 한 씨는 일 때문에 수시로 집을 비웠다. 일감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라도 달려갔다. "부산, 경기도 일산, 전국에 안 가본 데가 없습니다. 대구 건설 경기가 안 좋으니까 일할 데도 없고. 재희한테 미안한 게 많아요."

가정 형편 탓에 재희 씨도 일찍 철이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역의 한 전문대에 입학했지만 군대를 다녀온 뒤 "대학은 나중에 가도 늦지 않다"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아파트 분양 업무였다. 모델 하우스를 찾은 사람들에게 상담을 해주고 분양을 권하는 일이었다. 재희 씨는 집에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밝게 일했다. 그러다가 최근 대구 건설 경기가 나빠지면서 모델 하우스 일도 줄어들었고 5개월 전 세차장에 취업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아들이 사고를 당한 뒤 한 씨 부부의 병원 생활이 시작됐다. 요양보호사 일을 했던 어머니 손진자(가명'58) 씨도 아들 때문에 일을 그만뒀다. 지난해 성탄절도, 새해도, 1월 6일 한 씨의 생일도 병원에서 보냈다. 손 씨는 "떡국은커녕 재희 아버지 미역국도 못 끓여줬다"며 고개를 숙였다. 부부는 밥값이 아까워 즉석밥과 김치, 라면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형편이다. 16㎡(5평) 남짓한 보호자실에는 소파 두 개가 있다. 부부는 소파 하나에 함께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한다. 중환자실 면회 시간이 제한돼 있어 아들 곁을 지키지도 못하는데 멀리서 눈빛을 보내면서라도 아들을 안심시켜 주려 한다. "재희가 저렇게 아파하는데 내가 어떻게 집에 갈 수 있겠어요. 의식을 되찾은 뒤 재희가 더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면회 시간 때마다 재희랑 눈을 맞춰요. 빨리 일어나라고." 손 씨는 35일 동안 달서구 도원동에 있는 집에 딱 한 번 다녀왔다.

부부는 얼마 전 병원비를 중간 정산했다. 친척에게 카드를 빌리고 친구에게 현금을 빌려 1천600만원을 냈는데도 3천만원이 넘는 병원비가 쌓였다. 사체이식수술과 피부재생술 등 화상과 관련된 각종 수술이 성형 수술로 간주돼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는데다 재희 씨 앞으로 제대로 든 보험도 없다. 병원비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 얼마 전 주민센터에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다. 한 씨는 쌓여가는 병원비보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이 걱정이다. "살이 조금만 데어도 온몸이 쓰라린데, 얼마나 아플까. 재희야, 니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사노." 아들 없는 세상을 생각하니 한 씨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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