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동에서] 무서운 사람이 없다

입력 2012-01-17 07:26:48

기자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마을에서 10리 거리였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나오셨을 때 우리 학년 아이들의 아버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대부분 40을 바라보는 아버지들은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선생님에게 큰절을 했다.

당시까지 내게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모르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좀 과장하면 'almighty God'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선생님에게 큰절을 올리는 순간 선생님은 그 이상의 권위를 확보했다. 당연한 결과로 학교문제의 최종 해결사는 선생님이었다.

'권위주의'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쓴 지 꽤 오래됐다. '권위'에 '주의'라는 걸 붙이는 게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지만, 권위에 주의를 붙임으로써 이 말은 타파해야 할 무슨 '이념'이 돼 버렸다. 합리적인 절차보다 권위로 밀어붙이는 문제를 해결하자며 생겨난 이 말은 이제 그 목표를 넘어 인간이 가진 아름다운 가치인 '권위' 자체를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너거 선생' '의사란 놈들' 수준을 지나, 대통령을 지칭할 때도 동네 강아지보다 더 못한 대접을 한다.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인간의 건강과 목숨을 지키는 의사,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는 손톱만큼도 없다. 말하자면 '너나 나나 같은 인간이고, 다 같이 하루 세끼 밥 먹고, 추우면 떨고, 더우면 땀 흘린다' 그러니 '맞먹자'는 식이다.

방에 앉아 있다가 어른이 들어와도 눈 똑바로 뜨고 '너 왔냐?'라는 식으로 쳐다볼 뿐 일어설 생각조차 않는다. 똑같은 인간인데, 나이 좀 더 먹었다고, 회사 내에서 직책이 좀 높은 사람이 들어온다고, 선생님이 오신다고 일어서다니, 촌스럽고 웃기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배운 게 없으니 그 모양이다.

아는 사람들끼리는 그렇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는 어떨까? 모르는 사람들끼리는 한발 더 나아간다. 심하게 말하면 힘세면 장땡이다. 사소한 시비로 20대가 길에서 50대의 멱살을 함부로 쥐고 흔든다. 힘 말고는 존경할 만한 가치, 복종할 만한 권위를 모르는 것이다.

힘센 녀석, 싸움 잘하는 젊은 수컷이 대장인 사회는 '짐승의 사회'다. 짐승은 힘에 복종할 뿐, 권위에 고개를 숙이거나, 이성의 힘으로 스스로를 통제하거나, 낭만적 가치를 위해 양보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짐승인 것이다.

이성과 권위, 낭만은 인간이 가진 고귀한 가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고귀한 가치가 '철폐되어야 할 목표물'이 돼버렸다. 인간을 위한다고 목청을 높이는데 따져보면 모두 '짐승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외침일 뿐이다.

고래로 인류문명은 이성(理性)과 수성(獸性)의 두 바퀴로 굴러왔다. 철학과 과학을 통해 이성을 발달시켜왔다면, 문학과 예술을 통해 이성의 독주를 막고 수성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오직 수성만 남아 난리를 치는 것 같다. 힘센 녀석, 목소리 큰 녀석, 막가자는 녀석이 대장인 형국이다.

학교폭력으로 학생들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슬프고 분통 터지고, 참담한 일이다. 이 학생들이 동급생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보다 선생님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더 있었더라도 그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동급생의 '물리적인 힘'보다 더 센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그런 짓을 했을까.

선생님들과 사회의 어른들에게 권위를 돌려주어야 한다. 젊은 수컷의 철없는 '주먹'보다 더 센 '힘'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을 지키고, 사회를 지킬 수 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무서운 사람, 조심하고 고개 숙일 만한 존재를 알아야 한다.

조두진/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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