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등산길에 일찍부터 길거리에서 과일 노점을 펼쳐놓은 부부의 모습을 보며 '무척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부부가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며 그 부부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사과 한 소쿠리를 샀다. 비닐에 사과를 담아주시던 아주머니가 햇빛을 한껏 껴안아 발그레한 홍옥 한 알을 덤으로 손에 쥐여주신다.
한 알의 사과를 깨무는 맛, 물기가 조르르 스미며 새콤달콤한 사과. 꽃샘바람과 한여름의 뙤약볕, 그리고 태풍을 이겨낸 사과의 모습이 늠름하다. 그 열매 속에 숨어서 꿈틀거리는 햇빛, 바람, 비…. 문득 석현 스님이 떠올랐다.
나와 여고동창인 그녀는 자그마한 키에 차분한 성격을 가진 정이 많은 친구였다. 대학교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한 그녀는 특수교사로 학교에 몸을 담았다. 휴대폰이 없을 때였지만 우리는 거의 매일 안부전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대학생 때부터 사귀어온 사람과 결혼을 한다고 분주하던 그녀에게서 약간의 허전함을 느끼던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잠적을 해버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삭발을 하고 유난히도 빨간 사과, 홍옥을 한아름 들고 나타났다.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엇이 문제인가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홍옥을 반으로 잘 쪼개면 좋은 반쪽을 만난다며 불쑥 사과 한 알을 내게 건넸다. 소매 끝에 쓱쓱 문질러 윤이 나는 홍옥을 애써 반으로 쪼개려는 나를 보며 그녀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내손을 꼭 잡으며 자신은 출가할 거라고 했다. 치솟아 오르는 분노와 슬픔도 세월의 강물에 흘려보내고 나면 씁쓸한 미소라도 지을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그렇게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버렸다.
'흙바람이 일던 어느 날 /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시작되었어요 // 별빛 소곤대며 이파리에 녹아들고 / 소쩍새 소리도 가늘게 숨어들어 / 과수원의 파란 일기장을 채울 때에 / 당신을 향한 그리움은 영글어갔지요 // 흙속에 뿌리내린 모든 생명들의 / 휘파람소리 선명한 계절, 가을에 / 바알갛게 상기된 설레임 / 옷고름 매만지며 감춘 하얀 속살은 / 당신을 기다려 고이 간직한 몸이랍니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 사람은 누구나 가슴속에 홍옥 같은 사랑을 하나씩 간직하고 산다. 출가하기 전, 그녀가 건네주었던 빨간 사과를 추억하며 썼던 나의 졸시 '홍옥'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이것이 있으면 좋겠고 저것은 너무 부족하고, 하지만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자연에 맡긴 채로 묵묵히 어려움을 이겨낸 사과 한 알의 사랑스런 내음처럼 이 겨울, 사람들의 가슴마다 사랑의 향기가 흥건히, 흥건히 묻어났으면 좋겠다.
황 인 숙 시인'시낭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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