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마을 2년마다 오는 빨간조끼 '산타의사'…대구가톨릭대 해외봉사

입력 2012-01-14 08:30:04

대구가톨릭대 해외의료봉사단이 필리핀 쓰레기마을인 파야타스 주민들을 치료하고 있다. 결핵 환자가 유난히 많은 이곳에는 어린이들도 만성기침과 피부병에 시달리며, 아이들은 영구치가 나자마자 썩어버린다.
대구가톨릭대 해외의료봉사단이 필리핀 쓰레기마을인 파야타스 주민들을 치료하고 있다. 결핵 환자가 유난히 많은 이곳에는 어린이들도 만성기침과 피부병에 시달리며, 아이들은 영구치가 나자마자 썩어버린다.

세 자녀를 둔 필리핀 주부 멜라니야(32) 씨는 13일 새벽 잠을 설쳤다. 잔기침이 끊이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늘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멀리 한국에서 의사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한 시간이라도 빨리 진료를 받고픈 마음에 오전 4시쯤 집을 나섰다. 칭얼대는 한 살배기 막내를 안고, 세 살과 다섯 살 아이들을 재촉하며 한국 의사를 만나러 갔다.

멜라니야 씨는 "2년 전에 한국 의사를 만난 뒤 의사를 보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은 쓰레기 마을

대구가톨릭대 해외의료봉사단 39명이 8일부터 15일까지 필리핀에서도 가장 환경이 열악한 파야타스 지역에서 무료 진료에 나섰다. 마닐라에서 북동쪽으로 한 시간쯤 차를 타고 가면 스모키 마운틴(Smokey mountain)으로 불리는 거대한 쓰레기산이 있는 파야타스에 도착할 수 있다.

새벽부터 진료소 앞에 100여m가량 진을 친 사람들은 첫 진료가 시작될 때까지 적어도 너댓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거나 목청을 높이지 않았다.

의료봉사단이 임시 진료소를 차린 곳은 유난히 결핵이 많은 파야타스 주민들을 위한 병원. 매연과 악취에다 영양상태까지 좋지 않은 주민들은 유난히 결핵에 시달리고 있다. 매일 1~5명씩 새로운 결핵 환자가 생겨날 정도이고, 지난해 이곳 병원에서 진료한 결핵 환자만 485명을 헤아린다. 현재 약을 공급하고 있는 결핵 환자도 어른 85명, 어린이 185명이다.

선발대가 며칠 전 이곳 진료소에 약품을 가져다 놓고, 진료과목별로 구역을 정해놓았지만 질서를 잡는데 한 시간가량이 필요했다.

의료봉사단은 먼저 환자 접수부터 혈압과 맥박을 재고 간단한 문진까지 거친 뒤 환자에게 맞는 진료과로 안내했다. 의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 최선의 처방을 내리며, 약제부는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처방전을 처리해냈다. 중앙공급실은 곳곳마다 필요한 도구와 약재를 적재적소에 공급해주었다. 사전 실습도 없이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의료봉사단을 인솔한 김성근 신부는"전날 비행기 시간이 늦은데다 연착까지 하는 바람에 봉사단은 고작 세 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런데도 늘 웃음을 머금은 현지 주민들 덕분에 의료봉사단 누구도 짜증을 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고 했다.

◆하루 평균 500여 명 이상 진료

하지만 봉사단의 마음은 무거웠다. 조금이라도 더 도와주고픈 마음은 굴뚝 같지만 여건상 어쩔 수 없기 때문.

치과의 경우, 이가 썩으면 뽑을 수밖에 없다. 12살 안젤라는 어금니 한쪽이 조금 썩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썩은 부분만 없앤 뒤 충전재를 넣어 충분히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쩔 수 없다. 장비도 부족한데다 여러 번 치과에 갈 만큼 형편도 넉넉지 않다. 결국 영구치도 뽑아야 한다. 다행히 안젤라는 이번엔 이를 뽑지 않았다.

박인숙 치과 교수는"이가 조금밖에 썩지 않아 충분히 살릴 수 있다고 설명했더니 엄마가 꼭 치과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정말 치과에 갈 수 있을 지 걱정"이라고 했다. 다른 진료과도 마찬가지였다. 병명조차 모르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알려주고 병원으로 갈 것을 권유했지만 이들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머나먼 이국 땅에서 날아온 의료진은 이들에게 천사나 마찬가지다. 신경과, 소아과, 비뇨기과, 치과, 가정의학과, 이비인후과, 내과 의사와 함께 의과대학 및 간호대학 학생 등이 참여한 의료봉사단은 진료 첫날에만 500여 명의 환자를 보살폈다. 날이 지날수록 환자는 늘었다.

의료봉사단장인 김지언 교수(신경과)는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더 많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어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 열악한 환경 속에도 밝게 살아가는 이곳 주민들에게서 사랑과 감사, 기쁨을 배우게 됐다"고 했다.

파야타스 빈민가에서 진료소와 학교를 운영하는 파쿤도 멜라 신부는"워낙 주거환경이 나빠서 결핵, 피부병,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지만 생계를 잇기조차 힘든 주민들의 여건상 민간 병원은 꿈도 못꾼다. 2년마다 한 차례씩 벌써 세 번이나 찾아와준 대구가톨릭대와 의료원이 너무 고맙다. 하지만 다음에도 찾아와 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을 할 수밖에 없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필리핀 파야타스에서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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