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작업실에 있던 화집들을 한 상자 정리해서 대구미술관의 자료실로 보냈다. 꺼내면서 하나하나의 도록, 화집마다 그 시절 내가 그 작가들에게, 그 화랑에서, 혹은 미술관에서 가졌던 찬탄과 부러움 그리고 시기심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서른둘에 그림을 시작하면서 나는 작가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학부 전공도 아니고 직업도 따로 가진 내게 그 꿈은 참 품기가 버거웠다. 장바구니와 스케치북과 채 씻지 못한 붓, 직장의 일거리까지 뒤범벅이 된 짐을 들고 집에 들어가야 했다.
그 막막하던 시절 내 미술학교는 미술관이었다. 1970년대 초반의 일본과의 현대미술 교류전(여고생이던 그해 여름의 더위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부터 시작된 미술관 순례는 고비마다 흔들리는 나를 다지고 내 질투를 불러 일으켰으며 너의 꿈은 온당하다고 나를 위로했다.
지난가을 10년 만에 다시 뉴욕에 다녀왔다. 열흘 넘게 첼시지역(이 좁은 지역에만 화랑이 400개가 넘는다)을 발이 부르트도록 화랑과 작업실들을 방문하면서 나는 대구에 얼마나 많은 아까운 작가들이 묻혀 있는가 생각하고 안타까웠다. 만약 대구가 세계 속에 예술의 도시라고 알려진다면, 그래서 나처럼 먼 곳에서들 찾아오는 도시가 된다면 그렇게 묻히지 않을 수 있을 것을. 예술가는 그 도시의 창조적 지원으로 자라고 다시 창조의 빗물을 그 도시에 되돌려주는 선순환의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니 뉴욕이란 도시의 예술적 환경이 정말 부러웠다.
꿈은 다음 현실이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목표지점을 선명하게 설정하면 걸음은 그리 옮겨지게 마련이니까. 19세기에는 스페인 최고의 부자도시였다가 철강산업의 쇠퇴로 인해 '스페인의 더러운 콧구멍'이라 불리던 빌바오란 도시가 있다. 20세기 말에 이 도시는 재생을 꿈꾸고 3만2천500㎡의 부지에 구겐하임미술관을 유치하였는 데 7년의 건축기간에다 애초 책정된 예산의 1천400%를 초과해 완공되었다. 이 과정에서 저항하는 시민들을 설득하며 추진한 시장과 공무원의 의지는 한 해 100만 명을 넘는 관람객, 유럽에서 세 번째로 연회원이 많은 미술관, 시 인구와 시민소득의 대폭적 증가 그리고 빌바오에 산다는 시민들의 자부심으로 보상받았다. 동일한 상황에서 도박장을 세운 선택과 비교해 보라. 100만의 미술애호가가 붐비는 도시와 100만의 일확천금을 바라는 사람들의 도시를.
우리 미술관이 이런 꿈을 꾸어도 좋지 않은가? 리처드 롱의 작품이 대구미술관에서 저 유명한 나오시마미술관의 설치보다 더 감동적으로 다가올 때 나는 그 희망을 보았다.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미술관이다. 그래서 요즘 외지인을 만나면 대구미술관에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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