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동화…오! 해피 봉순

입력 2012-01-02 08:54:47

삽화:전숙경
삽화:전숙경

오! 해피 봉순

봉선혜와 붙어서 이길 수 있는 남자애는 우리 반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해피를 학교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지만.

쉬는 시간이 됐을 때 나는 가방에 몰래 넣어 온 해피를 조심스레 꺼냈다. 아이들이 순식간에 내 자리로 몰려들었다. 다들 귀엽다고 소리치며 한 번만 만지게 해달라고 해서 처음엔 기분이 우쭐했다. 솜뭉치처럼 하얗고 폭신한 해피를 보고 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런데 갑자기 봉선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이거 우리 봉순이 아냐?"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봉……, 뭐? 무슨 소리야. 내 해피한테."

"우리 봉순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봉선혜는 한 달 전 집을 나간 자기 집 강아지 봉순이가 틀림없다고 했다.

"봐, 여기 왼쪽 머리에 점처럼 까만 털이 있잖아. 우리 봉순이가 맞다니까?"

그러더니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사진 속 하얀 강아지는 내 해피와 똑같이 생긴……, 그야말로 해피였다.

"웃기지 마. 하나도 안 닮았거든? 얜 해피라구, 해피."

"어디서 주웠는데?"

"네가 알아서 뭐하게."

순간 나는 말을 다시 주워담고 싶었다. 주운 게 아니라고 했어야 하는데.

봉선혜는 씨익 웃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놔, 우리 봉순이."

나는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봉선혜의 행동이 전혀 장난 같지 않아서. 좀 남자답지 못한 행동인 건 알지만 이럴 땐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봉선혜는 끈질기게 들러붙으며 계속 떽떽거렸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해. 네가 우리 봉순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우리 집에 와서 보게 해줄게."

정말 기가 막혔다.

"그만 좀 해! 왜 남의 강아지를 자꾸 네 거라고 우기냐? 이름도 뭐? 봉순? 하! 촌스럽게!"

봉선혜가 눈을 아몬드처럼 뾰족하게 만들어 나를 흘겨보았다.

"오현준이 우리 봉순이 훔쳐갔다고 엄마한테 이를 거야."

"뭐?"

너무 당황해서 안고 있던 해피를 놓칠 뻔했다.

봉선혜네 엄마는 우리 엄마와 고등학교 동창이라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곤 했다. 물론 지금은 엄마가 집에 없으니 오지 않지만.

엄마는 한 달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가끔 나한테만 연락해서 곧 모든 게 끝난다고,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있으라고 말한다. 아빠와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 알지만 대놓고 물어본 적은 없다.

아빠는 내가 방에 해피를 몰래 숨겨두고 기르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회사 일이 바빠서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야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가끔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지만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아빠는 늘 피곤하니까.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아빠가 회사를 쉬고 집에서 늦잠을 잤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해피를 데리고 학교에 왔는데 그게 실수였다. 봉선혜가 엄마한테 일러서 집으로 찾아오면 아빠 역시 해피 기르는 걸 반대하고 화낼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봉선혜는 정말로 그렇게 할 것 같았다.

사실 2년 전에도 길에서 강아지를 주워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엄마가 똥개를 아파트에서 키울 수 없다며 내 '예삐'를 시골 외할머니네로 바로 보내버렸었다. 예삐는 시골 마당에서 살다가 어느 날 집을 나가 사라졌다. 해피도 그렇게 되면 난 정말 슬플 것이다.

그래, 어쩌면……. 시골집보다는 차라리 봉선혜네 집으로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몰라. 해피를 위해서.

해피를 봉선혜한테 보내 놓고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보내긴 했지만, 해피가 봉선혜 거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 같고 봉선혜한테 속은 것만 같아서 억울했다. 주말 내내 해피가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나는 봉선혜네 집으로 달려갔다. 해피를 안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봉선혜는 해피를 마당에서 키우고 있었다. 개집에 목줄이 묶인 채 앉아 있는 해피가 대문 틈으로 보였다. 해피를 이런 환경에서 키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밥이나 제대로 줄까?

대문은 잠겨 있었다. 나는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담을 넘어 봉선혜 집으로 몰래 들어갔다.

해피는 똥개가 아니었다. 엄마가 똥개는 멍청하다고 했는데 해피는 날 알아보고 짖지도 않았다. 나를 본 해피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었다.

'이것 봐, 해피도 나를 기다렸던 거야.'

해피를 안고 비비자 해피도 내 얼굴을 핥았다. 나는 조용히 해피의 목줄을 풀기 시작했다. 말도 없이 데려가는 게 나쁜 짓인 건 알지만 봉선혜가 먼저 시작한 거니까. 생각과 다르게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그때 갑자기 앞에 그늘이 졌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드니 봉선혜가 무서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봉선혜가 집을 향해 소리쳤다.

"엄마! 엄마! 누가 우리 봉순이를 훔쳐가려고 해!"

"야, 조용히 해."

나는 황급히 봉선혜의 입을 막았다.

"도둑놈아!"

봉선혜가 나를 쏘아봤다.

"내가 왜 도둑이야. 내 거 도로 데려가는 것뿐인데."

"봉순이가 왜 네 거야? 우리 집 거지."

"해피가 봉순이라는 증거 있어? 하얗고 점 있으면 다 너네 봉순이냐?"

"너 앞으로 우리 집 오지 마. 봉순이 보게 해준다는 말 취소야. 한 번만 더 우리 봉순이 건드리면 가만 안 둬."

"해피한테 자꾸 봉순이라고 하지 마!"

나는 왁 소리를 질렀다.

"봉선혜 동생이니까 봉순이지!"

봉선혜도 지지 않았다.

"내 강아지 이름은 해피야! 오해피!"

"웃겨, 넌 이제 안씨잖아. 그럼 안해피네, 안해피!"

갑자기 봉선혜가 이상한 말을 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봉선혜도 곧 입을 다물었다.

내 이름은 아빠 성을 따라 오현준이었지만, 엄마는 안 씨였다. 우리 부모님이 곧 이혼해서 내가 엄마와 함께 살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겠지. 아마 엄마가 봉선혜네 엄마한테 말했을 테고.

내가 아무 말 없이 노려보자 봉선혜도 곧 후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너 진짜 싫어."

나는 그대로 뒤돌아서 봉선혜네 대문을 쾅 닫고 집으로 갔다.

봉선혜가 한 말은 나를 정말 화나게 했다. 봉선혜가 이런 애였다니. 반에서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다고 봉선혜를 좋아하는 남자애들이 많았다. 물론 난 봉선혜가 예쁘다고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날 저녁 엄마가 집에 왔다.

한 달 만에 본 엄마는 조금 말라 보였다. 아빠도 오늘은 어쩐 일로 일찍 퇴근하고 집에 왔다.

오랜만에 엄마가 만든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우리 셋이 함께 밥 먹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식탁은 너무 조용했다. 수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엄마가 내 숟가락에 조기 반찬을 올려주며 말했다.

"내일 학교 갈 때 엄마랑 같이 가. 선생님도 찾아봬야 하고 준비할 게 좀 있어."

"나 이사 가?"

이상한 질문이었다.

"아빠는 바쁘시잖아."

엄마 대답도 내 질문만큼 이상했다.

"넌 엄마랑 사는 게 싫으니?"

'엄마랑만 사는 게 싫으니? 혹은 아빠랑만 사는 게 싫으니?'라고 물었어야 더 맞다.

엄마는 계속 조기를 발라 내 숟가락에 올려주었다. 아빠는 조기 반찬엔 손도 대지 않고 닭볶음탕만 먹었다. 엄마는 항상 고기보다 생선을 좋아했지만, 아빠는 생선을 싫어했다.

나는 사실 조기도 좋고 닭볶음탕도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둘 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너는 아직 이해 못 할 거다."

아빠가 말했다. 자주 보러 가겠다며 머리를 쓰다듬는 아빠 손을 쳐내고 싶었다.

엄마 아빠가 헤어졌다는 건 나도 알았다. 하지만 이유는 알지 못했다. 엄마 아빠는 왜 따로 살려고 하는 걸까? 왜 나는 내 뜻과는 상관없이 마치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는 걸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든 게 다 이상했다.

해피 생각이 났다. 해피가 보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봉선혜! 문 열어!"

나는 대문 철창을 잡고 흔들었다.

"야, 봉! 봉! 문 안 열어?"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봉선혜가 나왔다.

"해피 보러 왔다, 왜!"

"너 또 우리 봉순이 훔쳐가려고 그러지? 안 돼."

"내 해피란 말이야, 내 해피! 내가 왜 해피를 너한테 줘야 하는데?"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나도 해피랑 같이 살고 싶단 말이야!"

사실 나는 그냥 아무 데나 대고 소리라도 마구 지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까부터 가슴에 뭐가 콱 걸린 것처럼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봉선혜는 나 때문에 놀랐는지 주춤거리며 대문을 열었다. 나는 곧바로 해피에게 달려갔다. 해피도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겼다.

"알았어. 그럼 우리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내자."

봉선혜가 말했다.

"승부?"

"봉순이가 결정하게 하는 거야. 봉순이는 여기 두고 우리 둘이 저쪽에 떨어져 앉아서 봉순이가 누구한테 가는지 시합하자. 봉순이가 만약 너한테 가면 네가 데려가도 뭐라 안 할게."

그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런 식으로 봉선혜와 해피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게 과연 해피에게 잘하는 일일까. 게다가 난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해피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소용없어. 어차피 난 해피 못 데려가니까."

나는 해피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 뭉클하고 따뜻한 느낌이 품에 가득 찼다. 처음 해피를 주워 품에 안고 집으로 달려갔을 때가 생각났다.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 이제 엄마랑 살아."

"…… 그럼 학교는?"

"엄마 있는 곳으로 가니까 학교도 그쪽으로 가겠지, 뭐."

봉선혜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어색했다.

"봉순이 밥 줘야겠다."

봉선혜가 집으로 들어가더니 밥그릇을 들고 다시 나왔다. 해피가 코를 킁킁거리며 봉선혜에게 달려들었다. 봉선혜는 시래기와 밥이 담긴 그릇을 뒤집어 해피의 밥그릇에 쏟아 부었다. 밥 아래쪽에는 고기가 잔뜩 있었다.

"이게 뭐야?"

"불고기. 밥 먹으면서 엄마 몰래 식탁 밑으로 숨겼다."

봉선혜가 웃었다. 나도 왠지 웃음이 나왔다.

해피는 빈 그릇을 계속 핥았다. 봉선혜가 해피를 쓰다듬으며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해피도 봉선혜를 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처음으로 봉선혜 얼굴이 조금 예뻐 보였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불었다. 해가 지려나 보다. 마당에 딸려 있는 작은 정원에서 풀 냄새가 훅 끼쳤다.

나는 해피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무럭무럭 크게 해 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또 올 거야?"

봉선혜가 물었다. 왠지 봉선혜 눈이 빨갛게 변한 것 같다.

"왜?"

"뭐가 왜야. 귀찮으니까 그렇지."

봉선혜가 부루퉁해서 말했다.

"나 없는 동안 우리 해피 잘 부탁해."

"봉순이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봉순이는 너무 촌스러워."

"해피보단 훨 나아. 봉순이라고 불러. 봉순이야, 봉순이!"

봉선혜가 하도 봉순이 봉순이거려서 집을 떠날 때까지 귓가에 봉봉 소리가 계속 떠다녔다. 봉순이라는 이름도 이제 조금 괜찮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음에 만날 땐 봉순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역시 봉선혜와 붙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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