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엔 누구나 한 해 동안 할 일들을 생각한다. 그런 계획은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모습을 하게 된다. '나는 무슨 일들을 언제 어떻게 하고 그 결과는 이러이러할 것이다'하는 식이다.
새해 아침에 우리가 생각해 낸 이야기가 현실적이고 재미있을수록, 우리 삶은 그만큼 보람이 클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는 느닷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새해의 삶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연장이므로, 새해의 이야기도 지난 삶에 관한 이야기에 바탕을 둔다. 지난 삶의 줄거리, 어려운 고비들에서 고른 길들, 제대로 잡은 기회들과 머뭇거리다 놓친 기회들, 성취들과 실패들-지난 삶에서 가려낸 이런 요소들로 꾸며진 이야기는 새해에 우리가 꾸릴 삶의 폭과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관해서든 서로 다른 해석들이 나온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자신의 삶에 관해 스스로 쓰는 이야기의 성격은 한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그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근본적 영향을 미친다. 만일 그가 자신의 경험들에서 일관되고 도덕적인 주제를 찾아낸다면, 그는 미래를 보다 차분하게 전망하고 맞을 수 있는 심리적 자산을 지니게 된다. 그의 이야기가 혼란스럽거나 부정적이면, 그의 정체성은 흐릿해지고 미래를 맞을 심리적 자산도 적어진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 시민들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관해 참되고 또렷하고 도덕적인 이야기를 지닐 때만, 우리 사회는 또렷한 정체성과 밝은 전망을 지닐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세대들 사이의 틈이 걱정스러울 만큼 벌어진 까닭들 가운데 하나는 나이 든 세대와 젊은 세대들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관해 지닌 이야기들이 서로 크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나이 든 세대들은 침입한 북한군들과 힘들게 싸워서 끝내 물리쳤고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 경이적 경제성장을 이룬 벅찬 경험을 공유한다. 자연히, 그들의 이야기는 길고 흥미롭고 도덕적이어서 미래를 전망하고 맞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젊은 세대들은 사회가 이미 극빈에서 벗어난 시절에 살았다는 행운을 얻었지만 나이 든 세대들의 힘든 경험과 벅찬 성취감을 지니지 못했다. 따라서 앞선 세대보다 정체성이 흐릿하고 자신감이 얇다. 심리적 자산이 적은 그들에게 미래는 훨씬 위협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내력과 성취에 관해서 옳은 이야기를 많은 시민들이 공유하는 것은 세대들 사이의 이해와 소통을 돕고 세대들 사이의 틈을 줄여 사회적 응집력을 높이는 데 긴요하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엔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성취를 깎아내리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돌아다닌다.
이야기는 삶의 본질적 요소다. 우리의 지식들은 모두 이야기의 모습을 한다. 이 세상을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설명하는 물리 법칙들도, 따지고 보면 이야기다. 실은 우리의 삶 자체가 이야기다. 우리 유전자들에 담긴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우리 몸이 만들어지고 움직인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들은 삶을 지켜준다. '천일야화'에서 셰헤라자데는 밤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포악한 임금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막는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그녀가 임금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늘 덜 끝난 이야기라는 점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늘 내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끝난다. 아마도 거기에 삶의 비밀스러운 모습 한 자락이 있을 터이다. 현명하고 용감한 세헤라자데처럼, 사람은 날마다 열심히 살고 그 하루에 관한 이야기를 자신과 남에게 들려줌으로써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올해는 힘든 해가 되리라고 모두 얘기한다. 세계 경제엔 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우리 경제는 성장이 느려질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문제들과 갈등들이 늘어날 것이다. 다가오는 선거들은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 국제 정세도 더욱 불안해질 터이다. 주요 국가들에서 정권이 바뀔 것이고, 북한은 이미 갑작스럽게 지도자가 바뀌었다. 사정이 그렇게 어려운데, 임기가 끝나가는 이명박 대통령의 지도력은 오히려 줄어들 것이다. 이럴 때 요구되는 것은 '조심스러운 낙관'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룬 것들에 바탕을 두고 또렷하고 건강한 새해 이야기를 써나가야 한다.
복거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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