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숲 지친 삶, 자연회귀 분출…시선은 선비문화 본향 경북
온돌이 따뜻한 기운을 모으고, 마루는 시원한 바람을 부른다. 대들보와 서까래, 처마는 부드러움으로 이어져 운치를 더하고,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은 조형미를 뽐내며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연못을 낀 정원, 돌담과 흙길, 산과 내와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한다.
한국의 전통 고택, 한옥. 자연스러움의 과학을 담고, 한국인의 정서와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고택 안에 오롯이 한국과 한국인이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과 산업화 과정에서 수많은 고택이 사라졌다. 불타 없어졌고, 사람이 떠나 폐허로 변하면서 무너졌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전국에 80만 채에 달하던 고택이 2011년 현재 당시의 1%인 8천여 채에 불과하다.
고택이 줄면서 오히려 고택에 대한 관심은 늘고 있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와 정서가 반영된 때문일까. 성냥갑같이 포개진 아파트와 회색 콘크리트 건물, 아스팔트로 꾸며진 인공의 도시에서 탈출해 며칠만이라도 흙과 돌과 나무 향기를 맡으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고택을 복원하고 새롭게 단장해 체험과 문화의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지방자치단체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고택을 통해 한국인의 생활방식과 정서를 느끼면서 '전통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다.
본지는 가족의 정서, 전통과 역사문화, 한국적 정취를 담은 경북지역 고택을 지역별로 소개하고, 문화체험 등 관광자원화 방안을 모색하는 연재물을 새해를 맞아 25차례에 걸쳐 싣는다.
◆다시 살아오는 고택
사라져가던 한국의 고택이 꿈틀대고 있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아파트 등 공동주택에 밀려나고, 농촌의 고령화로 허물어져 가던 고택이 한국적 정서에 대한 재조명과 한(韓)문화 체험관광지로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선비와 유교 문화의 산실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택을 가진 경북지역이 특히 주목받고 있다. 경북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만 296채로, 전국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경북지역 고택은 최근 전통문화와 음식, 풍속을 되살리고 현대와 접목시킨 대표적 체험관광의 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고택 집산지인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 앞에서는 지난 7월 실제 경치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부용지애'가 공연돼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안동 학봉종택에서는 불천위(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학문이 높은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 제사를 통해 명문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청송 송소고택에서는 지난해와 올해 국제기타연주회와 오케스트라 공연이 성황리에 열려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란 점에서 주목받았다.
또 안동의 고택에서는 현존 최고(最古)의 요리서인 '수운잡방'을 재현한 음식이, 영양의 고택에서는 최초의 우리말 요리서 '음식디미방'의 재현 음식을 각각 선보이며 한국 전통음식 문화를 잇고 있다.
◆과학과 정서의 총화
고택은 자연의 산물인 나무와 돌, 흙을 주재료로 사용했다. 대문, 대청마루, 서까래는 나무로, 담벼락은 흙과 돌 또는 짚을 섞어 쌓았다. 창은 나무로 만들어 한지를 발랐고, 지붕은 볏짚으로 엮은 초가나 기와를 얹었다. 대들보부터 지붕까지 한국의 자연을 담은 셈이다.
난방을 위한 온돌, 냉방을 위한 마루, 한지를 깔고 콩기름으로 윤기를 내고 방수를 한 방바닥까지 고택은 과학의 총화이다.
고택은 또 공동체 문화와 사상을 담고 있다. 대가족이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를 중심으로 웃고 울며 정서를 공유해 온 공동체 문화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고택에는 전통음식과 놀이를 비롯한 생활풍속, 전통가문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다. 이 때문에 고택을 들여다보면 곧 한국과 한국인의 전형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고택은 바로 한국과 한국인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머슴의 거처 행랑채부터 왕의 궁궐까지
한국의 전통 고택은 계층과 문화의 다양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고택은 머슴이 살던 행랑채부터 임금이 살던 궁궐까지 계층별로 구분되고, 살림집에서 학습이나 제사, 놀이의 공간까지 기능별로도 다양하게 나눠진다.
양반 가문 고택의 경우 안채와 사랑채는 양반들이 주로 사용하고, 중문간 행랑채는 청지기가,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행랑채는 머슴들이 각각 거주하던 공간이었다.
고택은 주거공간 외에도 풍류를 즐기던 정자, 강학과 배움의 공간인 서원과 향교, 제사나 문중회의 공간인 재실까지 다양한 기능적 특성을 가진다.
◆문화와 역사를 이야기하다
반남 박씨, 신성 김씨 집성촌인 영주 수도리 무섬마을은 50여 채의 고택이 내성천의 맑은 물과 은백색 백사장, 야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택 마을과 내성천을 잇는 외나무다리는 관광객들에게 각광받는 놀이터이기도 하다.
낙동강이 앞으로 굽이치고 뒤로는 화산을 등진 곳에 자리한 안동 병산서원은 만대루 팔작지붕 처마 사이로 병산 절벽을 배경으로 한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학문과 업적을 기린 이 서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물로 꼽힌다.
일선 김씨 집성촌인 고령 개실마을은 영남학파의 거두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종택을 비롯한 고택들이 빼곡하다. 이 고택마을은 점필재 선생과 후손들이 남긴 유품 170여 점을 350여 년간 지켜오면서 성리학의 명맥을 잇고 있다.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의 정자인 연정고택은 깊은 산속 나무와 연못을 배경으로 자연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성산 이씨 집성촌인 성주 한개마을은 북비고택을 비롯해 한주종택, 월곡댁과 교리댁 등 고택들이 돌담길과 어우러져 영남의 명당으로 손꼽힌다. 의성 김씨 집성촌인 성주 윤동마을도 한개마을과 함께 성주의 대표적 전통 고택마을이다.
낙동강이 휘돌아 흐른다고 이름붙여진 하회마을은 서애 선생의 종택인 충효당을 비롯해 남촌댁, 북촌댁, 양진당, 하동고택 등 유서깊은 많은 고택을 안고 있다.
특히 안동에는 하회마을을 비롯해 임하면 내앞마을, 길안면 묵계리, 풍천면 가일마을, 도산면 온혜리, 와룡면 군자마을 등 경북에서도 가장 많은 고택과 고택마을이 전통을 잇고 있다. 울릉 나리마을은 울릉도 개척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투막집과 너와집이 섬 지역의 귀중한 고택문화를 담아 눈길을 모으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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