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책] 잎, 잎, 잎

입력 2011-12-24 07:00:08

잎, 잎, 잎/ 이기철 지음/ 서정시학 펴냄

이기철 시인이 15번째 시집 '잎, 잎, 잎'을 냈다. 이번 시집에 묶인 작품들은 극서정시로 미니멀 포엠이다. 시인은 "극 서정시는 쌀알에 우주를 그려 넣는 미세화 작업"이라고 말하고 "끊임없는 반추를 통해 사람들이 잊고 있는 사물, 망각 속에 파묻힌 시간, 힘겹게 찾아 나서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미세한 생활의 파편들을 찾아내는 과정이다"고 말한다.

'벚나무는 내가 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게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 내게 잘못이 있다면 자주 손 흔들어 남쪽을 가리킨 일뿐입니다(하략)' -벚나무는 내가 심지 않았습니다- 중에서.

벚나무는 튼실하게 자라 화사한 꽃을 피워내는데, 그 벚나무를 심은 사람은 없다. 벚나무는 수만 가지 사연을 품고, 그 사연을 하얀 꽃으로 피워내는데, 그 사연을 들을 길이 없다. 이것이야 말로 극미의 압축이자 서정이고, 바로 이기철의 시(詩)일 것이다.

이승하 중앙대 교수는 "서정시라는 것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다 못하고 돌아서는 것이다. 그 말을 했어야 하는데 하면서도 하지 않고, 다만 아쉬워하는 것이 서정시의 정신일 것이다"고 말한다.

'나비라는 소책자는 내 금서목록에 올라 있다/ 그의 책은 소리내어 읽어서는 안 된다/ 그의 날개에 쓰인 행간은/ 모두 점자로만 읽어야 한다(하략)' -나비- 중에서.

나비는 불온문서고, 하루를 펴는 책인데, 그 첫 페이지를 읽다가 시인은 한 해 봄을 다 보내버렸다고 고백한다. 대체 그 첫 페이지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기에 한 해 봄을 다 보내야 했을까. 그는 질문하되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쌀알에 우주를 그려 넣는다. 이것이 이기철 시인의 시다. 80쪽, 9천원.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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