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 왜 천대받는가
"정지서 지렁 갖고 온나."
요즘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경상도 방언으로 '부엌에 가서 간장을 가져오라'는 뜻이다. 이 말을 알아듣는 경상도 사람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40대에서는 상당수 사람들이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30대로 내려오면 상황이 달라졌다. 시골 출신이거나 조부모와 같이 생활한 경험이 있는 30대는 뜻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의미를 몰랐다. 20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경우라도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투리가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주변에서 사투리를 많이 쓰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같은 경상도 사람이지만 사투리를 심하게 사용하는 사람을 보면 어색해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볼 정도가 됐다. 생활 속에서 사투리는 시나브로 잊혀 가는 존재가 되었지만 방송과 영화에서는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다. 희비가 교차하는 사투리의 운명을 조명해 봤다.
◆사라지는 사투리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 사투리는 많다. 통시(변소), 질(길), 히야(형), 알라(아기), 버버리(벙어리), 삐개이(병아리), 택(턱), 대가빠리(머리), 가실(가을), 이까리(고삐), 비름박(벽), 거렁지(그늘), 시껍(식겁), 이부지(이웃), 깔딱질(딸꾹질), 만대이(정상), 삐까리(더미), 따깨이(뚜껑), 몰개(모래), 단디(분명히) 등 일일이 열거를 할 수 없을 정도다.
사투리가 사라져 가는 원인은 다양하다. 우선 표준어 사용을 권하는 사회 분위기를 들 수 있다. 사투리는 촌스럽고 듣기 거북한 반면 표준어는 세련되고 듣기 좋은 말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학교뿐 아니라 가정과 직장에서도 표준어 사용을 장려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더구나 면접에서 좋은 인상을 주려면 사투리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도 보편화되어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예 표준어 강좌를 마련한 지방 대학도 있다. 부경대는 올 9월부터 재학생들의 취업 역량 강화를 위해 '표준어 구사능력 향상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수도권 대기업과 공기업 등에 취직하려는 학생들에게 표준어 구사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기획된 '표준어 구사능력 향상 과정'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9월 20일 시작된 1기 과정에는 36명 모집에 51명이 지원을 했고 11월 7일 시작한 2기 과정은 모집 첫날 마감됐다. '표준어 구사능력 향상 과정'이 큰 호응을 얻자 부경대는 내년 1월 2일 3기 과정을 개강키로 하는 등 강좌를 계속 이어나갈 계획이다.
◆표준어 권하는 사회
사투리 가사가 문제되어 방송불가 조치를 받은 곡도 있다. MC 메타와 DJ 렉스가 만든 프로젝트 밴드 '메타와 렉스'가 올여름 발표한 노래 '무까끼하이'에 대해 MBC와 SBS는 비속어, KBS는 일본어식 표현이라는 이유를 들어 방송불가 판정을 내렸다. 대구 출신인 MC메타가 사투리로 랩을 쓴 '무까끼하이'는 '무식하게'라는 뜻의 경상도 방언이다. '무까끼하이'의 방송불가 판정은 표준어를 선호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방송불가 판정 이후 표준어에 밀려 사라져가는 방언을 되살릴 의무를 지닌 방송사가 황당한 이유를 들어 곡의 홍보를 막았다는 비판이 제기된 이유다. MC 메타는 "방언으로도 곡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만든 노래인데 우리말을 일본어 같다고 지적하니 당황스럽다. 차라리 욕설같이 들린다고 지적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의 발달로 표준어를 일상적으로 접하게 된 것도 사투리가 사양길로 접어든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예전에는 주로 가족, 친구들로부터 언어를 습득했기 때문에 사투리를 쓰는 집단 내에서는 사투리를 익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TV'인터넷 등이 널리 보급된 이후 사투리보다 표준어를 더 많이 접하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언어가 표준어로 획일화되는 작업은 가속화하는 반면 사투리는 점점 설 땅을 잃어 버렸다는 것.
표준어 보급에 초점이 맞춰진 국어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다. 국립국어원장을 지낸 이상규 경북대 교수는 "해방 후 표준어 공교육체제가 확립되면서 사투리는 제도권 밖으로 밀려났다. 마치 둥지(표준어) 밖에 있는 알(사투리) 신세가 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점차 사라지고 있다. 사투리는 언어의 변이종이기 때문에 다양할수록 언어생활이 더 풍부해진다. 사투리와 표준어를 대립관계로 보는 시각과 사투리가 촌스럽고 부끄럽다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말을 표준어로 삼은 국어 정책에 반기를 든 움직임도 있었다. 2006년 지역말 연구모임인 '탯말두레'는 "표준어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한정한 표준어 규정 및 표준어로 교과서를 만들도록 한 국어기본법 등이 행복추구권과 평등권, 교육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제기했다. 전국 각 지역의 초'중'고 학생과 학부모 등으로 구성된 '텟말두레'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초'등교육 과정에 지역어 보전 및 지역 실정에 적합한 내용의 교과를 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3년 동안 심리를 하며 공개 변론까지 진행된 이 헌법소원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9년 재판부는 "서울이 갖는 역사적 의미, 사용 인구가 가장 많은 점, 지리적으로 중앙에 있는 점 등의 다양한 요인에 비춰볼 때 서울말을 표준어로 삼는 것은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보기 어렵고 서울말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으므로 교양 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합리적"이라며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방송'영화에서는 사투리가 뜬다
사투리는 요즘 생활 속이 아니라 방송과 영화에서 더 자주 접할 수 있다.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KBS 개그콘서트에서 반 년 가까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코너가 있다. 상경한 3명의 경상도 사나이가 사투리 때문에 겪는 이야기를 개그로 풀어낸 '서울메이트'다. 서울에서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친구를 타박하는 내용으로 꾸며진 '서울메이트'는 "서울말은 끝말만 올리면 되는거 모르~니?" "서울말은 그렇게 발음을 세게 하면 안 돼. 아메리간 핫도그라고 해야지" "아이고, 이기 확 마 궁디를 주 차삐까?" 등 중독성 강한 유행어를 만들어 내며 사투리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MBC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도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4차원 고등학생 강승윤이 등장한다. 강승윤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경주 한의원집 아들로 감초 같은 연기를 펼치고 있다.
영화에서는 사투리가 더욱 많이 사용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투리를 보면 마치 팔도 사투리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경상도 사투리, 전라도 사투리, 충청도 사투리도 모자라 평양 사투리까지 등장한다. 언제부터인가 표준어를 쓰는 주인공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워질 만큼 사투리 영화가 전성기를 맞고 있다. '친구'(2001년) '웰컴 투 동막골'(2005년) '나의 결혼 원정기'(2005년) '사생결단'(2006년) '투사부일체'(2005년) '태풍'(2005년) '가문의 위기'(2005년) '맨발의 기봉이'(2006년) '국경의 남쪽'(2006년) '짝패'(2006년) '거룩한 계보'(2006년) '해운대'(2009년) '거북이 달린다'(2009년) '킹콩을 들다'(2009년) '평양성'(2010년) '아이들'(2011년) '투혼'(2011년) 등이 대표적인 사투리 영화들이다.
특히 충무로에서는 사투리가 흥행 수표로 각광 받고 있다. '해운대'는 1천100만 명의 관객을 그러모았으며 '친구'와 '웰컴 투 동막골'은 각각 800만 명, '투사부일체'는 600만 명, '가문의 위기'는 500만 명을 돌파했다. 또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압권인 '거북이 달린다'는 300만 명의 관객을 스크린으로 불러들였다. 이처럼 사투리가 영화의 흥행 소재로 자리 잡게 된 이유는 사투리가 갖고 있는 힘 때문이다. 사투리는 서울 사람들에게는 묘한 재미를 선사해 준다. 또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야릇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영화 속 주인공과 관객이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하지만 방송과 영화의 소재로 사투리가 사용되는 현실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지역 사람들의 삶과 정서가 담긴 사투리가 희화화되거나 사투리가 정확하게 구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MBC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강승윤이 맡은 역할은 경주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산 출신인 강승윤이 구사하는 사투리는 어색하다. 경주 사투리와 다른 부산 억양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2001년 개봉된 영화 '신라의 달밤'도 비슷한 구설에 올랐다. 영화의 배경은 경주이지만 부산 사투리가 등장해 눈총을 받았다. 이에 대해 직장인 이진우(38) 씨는 "영화나 방송에 사투리가 등장하면 재미가 있다. 하지만 사투리가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것을 보면 씁쓸한 감정이 드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투리를 살리자"
사라져 가는 사투리를 보전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2007년 사투리가 소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주어 보존 및 육성에 관한 조례'를 만들었다. 제주특별자치도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한 이 조례는 제주어 주간을 정하고 학교에서는 제주어 교육을 실시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최근에는 경남 진주시의회 의원들도 '진주지역 언어 보존 및 육성에 관한 조례'를 발의했다.
이에 대해 이상규 교수는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를 제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거시적으로 사투리 문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투리를 계승'발전시키려는 노력은 지역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국가가 나서 지역별 사투리를 종합적으로 수집'관리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
이 교수는 "지식정보화 사회의 키워드는 언어다. 방언도 언어의 한 종류다. 특히 방언은 단순한 지역 언어가 아니라 지역의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체계다. 방언이 사라지면 지역 문화도 사라진다. 문화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가 전국의 사투리를 모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맞춤법을 보면 일반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사투리에 대한 국가 정책은 국어학자 입장에서 접근하면 답이 안 나온다. 국민들이 사투리를 쉽게 찾아보고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경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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