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 야성과 광기를 용서하라

입력 2011-12-12 10:36:38

현대인은 스포츠에 열광한다. 운동장에서 직접 뛰는 선수보다 관중들이 더 열광적인 것 같다. 지난 2002년의 '붉은 악마들'이나 사직구장의 '부산갈매기'를 보면 차라리 광기가 느껴질 정도다. 이제는 야성이 거세된 것처럼 보이는 개도 밤이 되면 이빨을 드러내는 것처럼, 사람들도 운동장에 오면 평소에는 감추어져 있던 야성이 드러난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옷을 입히고 글러브를 끼우고 축구화로 맨발을 감싼다고 해서 야성이 완전히 감추어지지는 않는다. 주먹으로 가격하고 발로 차고 피를 흘리고 입이 터지는 가운데 야성이 폭발한다. 축구 경기에서 골을 넣은 선수를 보라. 사자처럼 포효한다. 서로 끌어안고 뒹굴며 윗도리를 벗어젖힌다. 관중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어디 관중들이 이성적 동물이던가. 집단 난동도 불사하는 야성적 동물이다. 현대인에게 스포츠는 체력 단련이 아니다. 억눌린 야성을 해소하는 집단 카타르시스의 종교 집회다. 인간이 동물인 이상 야성은 억제한다고 억제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해소될 필요가 있으며, 현대인에게 스포츠는 인간의 야성이 건전하게 해소되는 메커니즘이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리고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퇴화된 야성에 대한 그리움이 사람들을 운동장으로 향하게 한다. 따지고 보면 문명이라는 것은 야성을 길들이는 과정이었다. 이성의 칼로 야성을 거세하는 과정이었다. 들판에서 야수를 향하여 날리던 화살을 운동장에서 과녁을 향하여 쏘게 하고, 한지에서 호쾌하게 내갈기던 오줌을 화장실에서 누게 하고, 똥오줌을 집안에 갈무리하는 것이 곧 문명이며 교양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문명의 나른함에 식상해 하고 있다. 품위 있을수록 나른하고, 우아할수록 허약하다는 것을 눈치 채기 시작한 것이다. 신세대의 에너지 충만한 무질서는 문명과 교양을 거부하고 있다. 거침없이 야성을 드러낸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보는 일련의 창조적 괴짜들은, 참으로 신인류의 탄생이라 할 만하다. 이들은 이성으로 말하기보다는 몸으로 말하는 데 익숙해 있다.

이성은 인간을 투명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이성은 전가의 보도처럼 기세등등했으며,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 자신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은폐했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길바닥에 박힌 돌멩이나 들판에 뿌리박고 사는 잡초가 아닌 동물인 다음에야 야성은 본능이며 본질이다. 인간은 이성적 돌멩이가 아니라 이성적 동물이다. 그런데 문명화 과정은 지나치게 인간의 동물성을 억압했다. 유리처럼 투명한 이성이 인간의 전부일 수는 없다. 투명한 것은 오히려 얕다. 밤이 낮보다 깊은 이유는 거기에 있다. 깊이는 어둠에 있다. 끝 모를 창공이나 깊이 모를 바다 속은 푸르다 못해 검은 것도 같은 이유다. 오히려 우리의 삶에 깊이를 더하는 것은 투명한 이성이 아니다. 사랑은 깊다. 죽음도 깊다. 인간의 이성이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이성은 속수무책이다. '비까번쩍'한 학벌로 보나 가문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아도 저 여자가, 저 남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아니다. 착하디 착한 그 사람이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아니다. 아름다운 것들은 산 뒤에 있는 것처럼, 중요한 것들은 언제나 이성의 너머에 있다.

인간의 이성이란 고작 1 더하기 1이 2라는 것을 알게 하고, 삼단논법으로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그야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알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이성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정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인간의 이성은 속수무책이라는 고백뿐이다. 그게 이성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이성에 모든 것을 걸어왔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는 인간의 다른 한 측면, 즉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게 한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인간의 야성이 살아나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 보인다. 다행스런 일이다. 신세대의 야성과 광기는 정당하다. 용서될 필요가 있다. 거세된 말처럼, 야성을 거세당한 기성세대는 노쇠했다. 야성과 광기라는 새로운 피를 수혈받을 필요가 있다.

이거룡/선문대교수, 요가학교 리아슈람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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