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동에서] Again 1988

입력 2011-12-06 07:27:38

최근 강성호 대구서구청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서중현 전 서구청장이 갑작스레 총선 출마로 사퇴하는 바람에 몇 달 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강 청장의 의욕은 대단했다. 자연스레 "서구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때 함께 자리한 서구청 한 공무원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구청 한 공무원이 인터넷 모 채팅사이트에서 대구 사람들만 모여 있는 '대구방'에 들어갔다가 '어디에 사느냐'는 질문에 '서구'라고 대답한 직후 채팅방에 있던 사람들이 다 나가버리더라는 얘기였다. 물론 과장된 측면도 있겠지만 어쩌다가 서구가 이런 처지가 됐느냐는 허탈함이 남는 얘기였다.

기자는 서구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도 1980년 당시 서구 본리동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기억으로는 서구는 대구에서 꽤 큰 동네였다. 옛날 단독주택 부자들에게 잔디밭 없는 아파트를 '무관심'에서 '선호'로 바꾸는 데는 당시 서구에 우뚝우뚝 솟았던 아파트들이 큰 역할을 했다. 1979년 서구 7호광장 옆에 세워진 삼익맨션과 1983년 삼익뉴타운이 인근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레 부촌(富村)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서구는 인구가 최대 60만 명이나 됐던 거대 구였다. 또한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고, 경부고속국도'구마고속국도'중앙고속국도가 통과하는 교통 요충지이자 대구의 산업 중심지로 이름을 드날렸다. 서대구터미널과 대구호텔 인근은 각종 유흥업소 등의 네온사인 물결로 하루 종일 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랬던 서구는 1988년 대통령령에 의해 달서구가 신설되면서 내당동 일부와 본리동, 성당동은 물론 성서 전역을 빼앗기면서 구세가 급락했다. 분구되기 직전인 1987년 60만 명을 자랑하던 서구의 인구는 20여 년이 흐른 현재 22만 명으로 3분의 1토막이 났다. 44㎢이던 면적도 17㎢로 그만큼 줄었다. 재정자립도 역시 대구시내 구'군 중 꼴찌를 다투는 신세가 됐다.

기자는 수년 전 서구에 사는 한 독자에게 호된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수성구청에 출입하던 당시 수성구가 명품 도시로 개발된다는 주제로 쓴 기사 때문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신문에 '부자 수성구'에 대립되는 이미지로 서구를 이용하는 바람에 한동안 서구 주민들에게 시달렸던 아픈 기억이다. 당시 한 독자는 공정해야할 언론이 지역 간 위화감을 되레 조성할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몇 년이 흘러도 따끔할 정도로 기억이 생생하다.

변명은 아니지만 서구도 이젠 변해야 산다. 분구가 구세를 끌어내린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후의 서구민들의 안일한 생각이 더 큰 문제였을 듯싶다. 과거에 안주하느라 인근 신개발 지역과의 경쟁에서 밀린 것이 서구를 '대구의 대표적 낙후 지역'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수성구가 서울에서도 유명한 지역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비단 학군 때문만은 아니다. 얼마 전 만난 모 백화점 한 임원은 수성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의 근무 경험이 많은 그는 전국에서 수성구처럼 생활환경이 편리한 곳은 찾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편의시설의 집적도가 대단하다. 수성구는 '놀고 즐기고, 쉴 수 있는 곳'과 주거지 거리가 굉장히 가깝다 보니 앞마당에서 놀고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격이다. 서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취임 2개월을 맞은 강성호 서구청장은 이날 교육을 통해 젊은 사람이 돌아오는 서구를 만들겠다며 인구 60만 명이던 시절인 'Again 1988'을 외쳤다. 현재 무상급식을 하지 않고 있는 대구에서 처음으로 무상급식을 부르짖고, 구청에 교육전담부서를 신설하는 등 교육환경 개선에 나서는 의욕적인 모습이다. 첫술에 배부르겠냐 만은, 서구가 살아야 대구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기에, 그의 행보에 관심이 간다. 'Again 1988'을 넘어 'New 2012'를 맞는 서구를 꿈꿔본다.

정욱진/사회1부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