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타격' 지향한 완벽주의자
1992년 9월 25일. 부산 사직구장은 준플레이오프 1차전을 관전하러 온 부산 갈매기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경기가 시작되려는 찰나. 세 명의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만원관중 앞에 섰다. 장내 아나운서는 이날 선수 유니폼을 벗는 3명의 롯데 맨을 소개했다. 유두열, 박영태.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그라운드로 걸어온 사내는 '타격천재'로 불리며 방망이 한 자루로 그라운드를 평정했던 장효조(당시 36세)였다. 은퇴를 발표한지 6일 만에 갖게 된 은퇴식이었다. 장효조는 팬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 그러나 자꾸 3루 쪽 더그아웃으로 시선이 쏠렸다. '내가 있어야할 곳은 저곳인데….' 그쪽엔 고향 팀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이 일렬로 줄지어 그라운드에 선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출범 이듬해 삼성 유니폼을 입은 장효조는 이날 롯데 유니폼을 벗기까지 10년간 961경기에 출전해 통산 타율 0.331를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장효조의 통산타율 기록은 출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도 근접하지 못한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1천9개의 안타, 54홈런, 437타점, 109도루의 기록은 프로에서 땀으로 이룬 결실이었다.
타율 1위(1983, 1985~1987년), 최다 안타 1위(1983년), 출루율 1위(1983~1987, 1991년), 골든글러브 5회(1983~1987), 정규시즌 MVP 1회(1987). 그는 말이 필요 없는 국내 최고타자였다. '타격 달인', '타격 교과서', '안타 제조기', '타격 천재' 등 타격에 관한 한 최고의 찬사를 독식했다.
그런 그도 세월을 막진 못했다. 그는 "1천 안타 기록과 MVP 수위타자 등 타자로서 갖고 싶었던 기록을 모두 달성해 더 이상 욕심을 낼 곳이 없어졌다. 체력의 한계도 느꼈다"고 은퇴 소감을 밝혔다.
1982년 프로출범 원년. 최강 전력의 평가 속에 시즌을 연 삼성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OB베어스에 1승1무4패로 무너지며 원년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지 못했지만 낙심하지 않았다. 83년 장효조의 입단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타격에 관한 한 천부적 소질을 인정받은 장효조는 82년 아마추어 국가대표로 묶여 1년 늦게 프로에 뛰어들었다. 시즌 초반 김재박, 김일권, 김성한 등에 잠시 타격 1위 자리를 내준 적도 있지만 타격천재가 프로에 적응하는 데는 전반기면 충분했다. 그는 타율 0.369로 데뷔 첫해 타격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포철공고 오대석 감독은 "장효조 선배는 1구를 안 치기로 유명했다. 어떤 공이든 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시즌 중반 나무배트에 적응하면서 오른쪽 왼쪽 가릴 것 없이 밀고 당기며 안타를 만들어냈다. 배트를 짧게 잡으며 공을 정확하게 맞히는 데 주력했지만 18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예리한 파워도 뽐냈다"고 말했다.
8타석 연속안타의 대기록까지 세운 장효조의 단점은 인기관리가 다소 미흡하다는 것뿐이었다.
삼성 관계자는 "당시 장효조는 뛰어난 실력에도 이만수, 김시진만큼 팬들의 환호를 받지 못했다. 팬들을 매료시키는 큰 액션도 없었고, 자존심 강한 성격에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많은 팬들이 섣불리 다가서지 못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오히려 그런 모습에 반한 팬들은 골수팬이 됐다"고 말했다.
장효조는 오로지 야구에만 집중했다. 롯데로 트레이드 된 이듬해인 1990년 타율이 0.275로 0.300 아래로 떨어지기 까지 7시즌 연속 0.300(1983년 0.369, 84년 0.324, 85년 0.373, 86년 0.329 87년 0.387, 89년(롯데) 0.303) 이상을 쳐냈다.
"야구와 인연을 맺고부터 많은 일상적인 것들을 잊고 살아왔다. 프로는 냉정했다. 전쟁터처럼 생존경쟁을 펼쳐야했다. 늘 긴장했고 한눈을 팔지 못했다."
장효조는 만족하지 못하면 자신에 채찍을 가했다. 지고는 못사는 성질 때문이었다. 자존심 강한 그에게 84년 롯데와의 한국시리즈 최종전은 두고두고 있지 못하는 한이 됐다. 삼성 2군 감독으로 재직할 때 현역 시절 이야기를 물으면 그는 "외야에서 공도 못 잡는데 뭘 잘했다고"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야구인생에서 그 일은 20년이 훨씬 지난 뒤까지도 목털미를 뻐근하게 하는 일로 남았다.
무엇이 그를 괴롭혔을까. 84년 한국시리즈는 3승3패로 삼성과 롯데가 팽팽히 맞섰다. 최강자를 가리는 마지막 대결은 잠실에서 열렸다. 4대1로 삼성이 이기는 가운데 맞은 7회초 수비. 조금만 더 있으면 삼성은 첫 우승 헹가래를 칠 터였다. 그런데 1사 1루서 타석에 들어선 한문연이 바깥쪽으로 빠지는 김일융의 공을 밀어 쳤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우익수 장효조에게 날아갔다. 장효조는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공이었다. 그러나 놓치고 말았다"고 말했다. 우측 펜스까지 굴러가며 3루타가 됐고, 결국 실점으로 연결됐다. "내가 어처구니없는 실책으로 한 점을 내주고 말았다. 관중의 야유가 쏟아졌다."
불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8회초 정영기의 타구가 내 앞으로 날아왔을 때 나는 잡을 엄두도 못 내고 안타를 만들어주었다. 결국 유두열의 홈런으로 전세가 뒤집혔다."
그날 밤 장효조는 혼자 술집에서 자신에게 괴로운 질책을 퍼부었다. '나 때문에 졌다.' 통한의 밤이었다.
장효조는 더욱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86년 타율 0.329로 2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했고, 그 다음해인 87년에도 타율 0.387로 3년 내리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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