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23)박복조 시인의 대구 포정동

입력 2011-12-03 08:12:00

자동차 기차 요란한 소리속에서 경상감영 안마당이 놀이터

내고향은 꽃피는 산골도, 파도가 철썩이는 어촌도 아닌 대구시 중구 포정동이다. 어릴 적에 앞마당처럼 뛰어놀던 경상감영공원 선화당에 앉아 지난날을 회상한다. 단오날이면 창포로 머릴 감겨 주시던 어머님의 얼굴이 빨간 단풍처럼 아련하게 그리워진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내고향은 꽃피는 산골도, 파도가 철썩이는 어촌도 아닌 대구시 중구 포정동이다. 어릴 적에 앞마당처럼 뛰어놀던 경상감영공원 선화당에 앉아 지난날을 회상한다. 단오날이면 창포로 머릴 감겨 주시던 어머님의 얼굴이 빨간 단풍처럼 아련하게 그리워진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박복조 시인
박복조 시인

고향은 누구나의 가슴에 그립고 아프고 철없는 아이가 한 송이 꽃으로 꽂혀 있는 곳이다. 언제나 달려가 그때의 내가 되어 보고 싶은 유년이 살고 있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아니다. 파란 물결 바다도 아니다. 나는 아스팔트 위로 자동차가 지나다니고 많은 사람들이 시끌벅적 오가는 곳, 도시의 아이였다. 옛 도심 복원사업이 한창인 대구시 중구 포정동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워낭소리 들리는 호젓한 시골길, 언덕 아래 냇물이 맑게 흐르는 산골이거나, 파도소리가 철썩이는 어촌이 나의 고향이었으면 했다. 고향에 살면서 자연이 펼쳐진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런 연유로 방학만 되면 부산 고모 댁을 찾았다. 해운대 모래톱에서 모래성을 쌓고 수평선 너머 꿈을 걸어두곤 했다. 커서는 겨울 바다를 혼자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옛집은 아련한 기억 속에 떠오르는 기역자 큰 기왓집이었는데, 단오가 되면 연못 옆에 핀 창포를 베어와 창포물로 머리를 감기고 창포 잎을 나비처럼 접어 머리핀으로 꽂아 주셨던 어머니가 앉아계신다.

여섯 살 적 '실달유치원' 뒤뜰의 달팽이는 어떻게 춤을 잘 추었던지 "영감은 장구치고 할마씨는 춤춘다"라고 노래 해주면 신이 나서 엉덩이가 쑥 빠질 정도로 제 몸을 일렁거리며 빠져나왔다. 우리 집이 있었던 터는 헐리고 아세아 극장이 들어섰다가 지금은 대형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지금 미도백화점이 있는 큰 거리는 벌판이었고 가끔 서커스단이나 유량극단이 오면 펄럭이는 깃발을 따라 쫓아다녔다. 한겨울 그 넓은 길을 책보를 안고 등교를 할 때면 매서운 살얼음 박힌 바람은 내 발목을 뒷걸음치게 했던 기억이 빼빼 말랐던 아이 위에 오버랩 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우리는 학교를 군인들에게 내어주고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담임선생님의 온돌방이 교실이 되기도 했고, 나뭇가지에 칠판을 걸어두고 수업하는 자연교실이 대부분이었다. 6년 때는 공부한답시고 동무들과 모여 공부는 조금, 물구나무서기로 끝을 내었는데, 자다가 호야등이 넘어져 옆에 자던 다섯 살배기 남동생의 머리칼이 타 들어가 혼이 난 적도 있다. 그때는 공비가 팔공산까지 내려와 있을 때라 공습경보가 있었다. 사이렌이 울리면 미숫가루와 작은 소지품이 든 각자의 등에 짐 가방을 짊어지고 피란 갈 준비를 했다. 모두 방 복판에 펴놓은 이불 속으로 숨어든다. 이윽고 해제 사이렌이 울리고 불이 켜지면 웃음이 절로 났다. 식구들이 얼굴만 이불 속으로 파묻고 다리는 모두 밖에 나와 있지 않은가! 마치 큰 해바라기 꽃잎 같았다. 그 해바라기 가족들은 우리 흩어지면 대구역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었다. 어른들은 어린 우리만 중리동으로 피란을 보냈다. 그때 농촌을 처음 경험했다. 멍석을 깔아 밤하늘의 별을 보며 모깃불을 피우고 반딧불이를 잡아, 호박꽃잎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 책을 보기도 했다. 중등시절에는 수업시간에 책상 밑으로 책을 읽었다. 닥치는 대로 유정, 무정, 상록수, 타잔, 레미제라블 등을 읽었는데 성적이 급강하하여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공부를 한 적이 있다. 휴전이 되어도 돌아갈 곳이 없는 이북 피란민을 어머니는 집세를 받지 않고 오랫동안 방 하나를 주어 살게 했고, 부인이 중병에 걸렸을 때 약까지 사다 주셨다. 지금 동생이 살고 있는 포정동 52번지는 경상감영공원을 마주하고 있다.

내 소녀의 꿈이 피어난 곳,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여기에서 다니며 부모와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사진작가이셨다. 산천을 다니며 작품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내가 단발머리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는 달성공원에서 만난 수염 긴 할아버지를 모델로 사진을 찍으며, 가슴까지 내려온 흰 수염을 덥석 잡으라고 했다. 만질 듯 왜 그렇게 안 되던지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부끄럽기만 하다. 2층으로 올라가면 벽 액자에 '인생은 일대 사진은 만대'란 말은 아버지의 신조였다.

멀리 보이는 앞산은 언제나 우리 집 뜰에 솟아 있었다. 고교 1학년 국어시간이었다. 선생님은 교탁 앞에서 내가 쓴 시를 읽게 하고 '먼 듯 가까운 산'이란 표현이 좋다면서 칭찬을 많이 해 주셨다. 웃음이 함박꽃 같던 선생님 때문에 나는 문학의 꿈을 꾸었고 끝내는 문학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언제나 고향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고향이 있는 하모니가 있던 집, 마음 주머니에 넣어둔 유년의 고향을 슬그머니 꺼내본다. 꿈을 그리며 이상을 품던 여고시절, 경북여고 백합의 교정, 지금 나는 큰 시공을 넘어 그때 그날의 소녀가 되어 연못을 거닌다.

달성공원으로 소풍을 자주 갔다. 거기에서 이상화 시비에 새겨진 '나의 침실로'를 읽으며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히도록 달려 오너라'의 대목에서는 이제 막 피어오르는 단추 만한 꽃봉오리 젖가슴을 발그레한 볼에 비추어 보았다.

대구역에서 가까운 우리 집은 친척들의 '밥 정거장'이었다. 보리밥을 한 소쿠리 걸어두면 김치와 된장으로 배불리 먹고 떠나던 뒷모습이 아련하다

아직도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었던 그날, 일천 구백 육십년 이월 이십팔일, 여고생인 나는 우리 집 2층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집 앞에서 갑자기 지축을 뒤흔드는 큰 함성이 들려왔다. 대구에서 최초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 경북고 2'28 학생의거, 물밀듯 들이닥치는 학생들이 거리를 꽉 메우고 스크럼을 짠 어깨들이 철통같았다. "독재정권 물러가라, 이승만은 하야 하라"를 외치며 경북도청으로 들어갔다. 곧 지프가 오고 경찰들은 무차별 곤봉을 휘둘렀다. 데모를 처음 본 나는 온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고 길에는 피 묻은 교복과 교모 책가방 신발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지프에는 학생들을 종이 구기듯 구겨 넣고 곤봉으로 내려쳤다. 데모대가 흩어지고 난 길은 젊음의 피로 얼룩졌었다. 그때 터질듯한 가슴을 누르며 처음으로 애국이라는 말을 중얼거려보았다. 정의를 위해 끓는 피, 그 위대한 의거가 평생토록 내 삶에 크고 아름다운 꽃으로 남겨졌다. 터지는 울분을 그 길에서 보았다. 현대사의 큰 장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불의를 거부하며 성난 해일로 밀려오던 천둥 같은 거대한 불꽃은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이었다. 모든 데모대가 그곳을 향했고 지방 정부가 있던 중심, 대구 읍성의 심장인 경상감영공원은 2'28의 산실이고 4'19가 태동한 곳이다. 민주화의 성지가 중앙통인데 표지석 하나 없는 것이 섭섭하다. 대학은 국문과에 가고 싶었지만 약학과에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는 문예반 활동을 하고 대학신문에는 단편 등을 내면서 문학을 잊지 않았다. 대학 4년 동안 한결같은 정성으로 어머니께서는 내가 어려운 약학공부를 할 때 힘들어 하면 늘 삶은 달걀 2개와 커피를 잊지 않고 머리맡에 챙겨 주셨다. 지금 돌이켜 보면 눈시울이 젖어든다. 마음이 흔들릴 때 이 삶은 달걀을 생각하며 내가 선 자리에서 더욱 굳건한 뿌리로 일어서게 된다. 부모들이 겪은 나라 잃은 서러움과 가난, 해방 그리고 우리가 겪은 피의 상쟁과 휴전, 근대화 이런 민족의 영욕과 수난사가 깃들어 있는 고향의 길을 걸어 본다. 우리 집 둘째 골목에 있었던 녹향 음악감상실에서 듣던 클래식 선율이 흐르는 듯하다. 내고향 대구는 나에게 60여 년 세월의 무게를 떠받치고 다가온다.

박복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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