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저율(猪栗)

입력 2011-12-01 10:52:34

'멧돼지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산속을 어슬렁거리다가 나무 밑 땅바닥에 널려 있는 도토리를 발견했다. 속이 출출하던 차에 정신없이 주워 먹었다. 혹시 더 있지 않을까 해서 낙엽을 파헤치니 또 여러 개의 도토리가 나왔다. 멧돼지는 땅을 파면 도토리가 자꾸만 나오는 줄 알았다. 그래서 계속 땅을 파헤쳤다. 그 바람에 뿌리가 드러난 도토리나무가 쓰러졌고, 멧돼지는 먹이를 제공해 준 그 나무에 깔려 죽고 말았다….'

멧돼지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이 우화는 인간의 지나친 욕심을 빗댄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올가을 들어 멧돼지의 도심 출몰이 더욱 잦다. 그러다 보니 근래 개봉한 영화 '차우'의 한 장면처럼 멧돼지와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산속에 있어야 할 멧돼지가 이처럼 도심 지역에 무시로 나타나는 것은 다 사람들 때문이다. 저들이 살아갈 서식지를 마구 파괴하고 먹잇감을 빼앗아 가버리니 그것을 되찾아 사람이 사는 마을과 도시로 내려오는 것이다. 먹이사슬 교란으로 천적이 없는 멧돼지 개체 수가 급격히 늘어난데다 생태계 훼손으로 서식지가 단절되고 파편화되면서 먹이가 부족한 멧돼지들이 사람이 사는 공간을 침범하고 있다.

멧돼지가 특히 좋아하는 먹이가 도토리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이 죄다 채집해 가버리는데다 올해는 이상기온과 집중호우로 도토리 결실이 더욱 모자라자 허기진 멧돼지들이 음식 냄새를 쫓아 주택가로 뛰어드는 것이다. 도토리는 멧돼지뿐만 아니라 많은 동물의 식량 자원이다. 딱따구리, 어치, 다람쥐, 꿩 등에게 없어서는 안 될 열매다.

고려 말경에 간행된 의약서인 '향약구급방'은 도토리를 '저율'(猪栗)로 적고 있다. 멧돼지(猪)가 즐겨 먹는 알밤(栗)을 사람들이 몸에 좋은 건강식품의 원료라 하며 무분별하게 주워가 버리니 배고픈 멧돼지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쳐들어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저돌적(猪突的)이다.

올 들어 멧돼지의 잦은 도심 출현을 두고 '도토리 흉년' 탓으로 돌리는 전문가의 분석도 없지는 않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동물들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동물들의 먹이까지 싹쓸이해가는 인간의 탐욕 때문이 아닐까. 도토리 더 먹을 욕심으로 계속 땅을 파다가 나무에 깔려 죽은 멧돼지를 보고 미련하다고 웃을 일이 아닐 듯하다.

조향래 북부본부장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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