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 만발한 봄…주홍빛 감으로 물든 가을…내 감성의 밑그림
대구에서 경산 자인을 거쳐 남산을 지나면 내 고향 청도군 금천면 동곡리가 나온다. 동곡은 운문댐과 인접해 있고 동창천을 사이에 둔 면소재지이다. 봄이면 화사한 복사꽃 밭이 무릉도원을 꿈꾸게 하고 푸른 하늘이 펼쳐진 가을날엔 집집마다 주홍빛 감들이 탐스럽게 익어 마을을 온통 가을빛으로 물들이곤 한다.
'복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했듯이 고향의 봄은 분홍물결로 넘실거리고 초여름부터 늦은 여름까지 출하되는 갖가지 복숭아는 맛보기 전에 상큼한 향으로 고향의 향기를 먼저 전해준다. 그리고 씨 없는 감으로 알려진 청도반시는 감와인, 감말랭이, 곶감, 최근에 화장품 개발까지 여러 가지로 쓰임이 많다.
앞마당을 비롯하여 집주변이 온통 감나무 천지라 감에 얽힌 추억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얀 감꽃이 필 때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감나무 밑을 서성였다. 주운 감꽃을 꿰어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고 주렁주렁 목에 걸고 다니면서 감꽃을 하나씩 곶감 빼먹듯 먹었다. 아싹한 감꽃은 처음 입안에 넣으면 떨떠름한 맛이지만 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났다. 초복을 지나 배꼽을 뗀 감이 조금 몸피를 불릴 때쯤은 떨어진 감을 주워 삭혀 먹었다. 작은 단지에 소금물을 풀어 양지 바른 곳에 두고 날마다 감이 익었는지 살폈다. 기다림에 조급해 한입 깨물어 떫은맛이 비치면 도로 넣어두곤 했다.
잊혀지지 않는 추억들이 어디 그뿐이랴.
개울가에서 남자아이들과 함께 손으로 송사리 떼를 잡아 고무신 가득 채우기도 하고, 여름밤이면 새콤하게 익어가는 풋과일 서리를 즐겼다. 과일 서리는 그날 저녁 나오지 않은 어느 친구네 밭이 표적이 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느티나무 아래서 도시락을 까먹고 한동안 공기놀이를 하다 그마저 심드렁해지면 강둑 풀밭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으며 소망을 빌기도 했다.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유년의 추억들은 삶이 고달플 때마다 가슴 한쪽을 따뜻이 데워주는 불씨와도 같다.
군내 유일한 가축시장으로 명맥을 유지해온 동곡장은 1일, 6일에 서며 산동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장날이 되면 소달구지들이 긴 행렬을 잇곤 했는데 이른 새벽부터 시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가득 싣고 몇 십리나 되는 먼 길을 나선 것이다. 친구들과 시장 구경을 다니면 시간가는 줄 몰랐고 국화꽃을 피워내는 빵틀 앞에서는 군침을 삼키며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가끔 하굣길에 소를 팔고 돌아오는 빈 트럭을 보면 손을 들어 태워 달라고 했다. 여기저기 소똥이 묻어 있었지만 좀처럼 차를 타 볼 기회가 없었기에 그런 날은 횡재한 기분이었다.
고향의 밑그림에는 유년기와 학창시절의 추억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중학교 때까지 많던 동네친구들이 고등학교 입학 무렵에 다 흩어졌다. 그 시절, 집집마다 어려운 형편은 매한가지라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산업전선으로 뛰어든 친구도 많았다. 부모님은 흙과 더불어 투박한 삶을 살아오셨지만 누구보다 자식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남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철부지였는지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부모 곁을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닌 중고등학교는 비단 같은 물이 흐르는 곳이라 하여 '금천'이라 지었단다. 학교와 인접한 곳에 바로 그러한 새들보가 있다. 지금은 체육공원으로 조성되었지만 당시 그곳에서 남학생들은 수영을 즐겼고, 여학생들은 다슬기를 잡거나 강둑의 쑥을 캐곤 했다. 시골학교라 겨울이면 전교생이 난방용 땔감을 구하기 위해 인근의 산에 오르기도 하고 농번기에는 일손을 돕기 위해 모내기와 보리베기 지원을 나갔다. 남녀공학이라 까까머리 남학생들과 한 교정에서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힘겨운 책가방에 꿈을 싣고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세기의 세월이 흘러 귀밑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었다.
지금은 학생 수가 부족해 위기에 처해진 것을 모교동문회에서 장학회를 운영하여 꾸준히 재학생을 후원하며 신입생 유치에 힘쓰고 있다. 몇 해 전부터는 기숙사가 완공되어 도회지 학생들까지 유학을 오기도 한단다.
주변의 볼거리로는 운문댐과 박곡리 대비사, 석조여래좌상, 임당리 김씨고택이 있고 고색창연한 고가체험 숙박이 가능한 신지리 선암서원, 운강고택과 만화정 등 역사가 깊은 곳이 많다. 신지리는 밀양박씨 문중으로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할 만큼 전통고가가 밀집해 있다.
운강고택은 조선시대 소요당 박숙 선생이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옛 서당터에 세운 조선 후기의 주택이다. 영조 2년 박중응이 지은 후 순조 24년 운강 박시묵 선생이 지금처럼 안마당과 안채후원'사랑채후원 등 넓은 공간을 여유 있게 큰 규모의 집으로 다시 지었다. 만화정은 운강 선생이 철종 7년에 세워 공부하며 학문을 강의하던 곳으로 안방에는 찬방과 찬마루를 따로 두었고 대청에도 여름철을 위한 찬광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임당리 김씨고택은 내시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란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대부분의 한옥에서 방문은 남향으로 두는데 방문을 임금이 있는 북향으로 낸 것이 특징이다. 솟을대문을 마주 보고 사랑채가 있고, 우측으로 토담을 쌓아 사당을 두었다. 내부공간인 안채의 노출을 꺼리고 출입을 통제하며 여성의 동선을 제한하려는 주인(내시)의 의도가 건축적으로 표현된 것을 느낄 수 있다.
먹을거리로는 80년 이상 전통 깊은 동곡 막걸리가 있고 추어탕과 고디탕이 유명하다. 칼슘이 많아 자양강장식품으로 인정받는 청도추어탕은 미꾸라지만 사용하는 타지역과는 달리 미꾸라지와 함께 민물 잡어를 사용한다. 주재료가 동창천 1급수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사용하여 얼큰하고 담백하여 깊은맛이 우러난다. 추어탕 끓이는 법을 배우지 않았지만 내가 끓인 추어탕을 먹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이를 보면 어릴 적부터 먹어 온 입맛이 손맛으로 제법 흉내는 내는가 싶다.
글을 쓰다 말고 고향을 다녀왔다. 추억이 어린 장소를 불현듯 둘러보고 싶고, 늦가을의 정취를 대비사 깊은 골에서 느껴보고 싶었다. 빨강 노랑 단풍잎들의 황홀한 연주도 얼마 남지 않은 듯 가로수 밑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가고 양지바른 농가의 뜨락에는 누런 호박들이 줄지어 앉았다. 대비사로 향하는 길목에는 은빛갈대가 운치를 더해주고 깊은 산자락 끝에 위치한 저수지는 가을빛이 완연하다. 고요한 저수지에 잠긴 가을 산 빛이 한 폭 수채화를 빚어낸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지만 인공의 힘으로는 자연의 신비롭고 오묘한 느낌을 어찌 다 담아 낼 수 있으랴
억산을 병풍처럼 둘러싼 대비사(보물 제834호)는 천년고찰로 '대자대비'란 뜻을 품고 있다. 신라 진흥왕 27년에 신승이 세우고 진평왕 22년에 원광국사가 보수했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양식으로 전체구성이 짜임새가 있고 다포식(多包式) 맞배지붕이다. 대웅전의 풍경은 늦가을 햇살에 저물어가고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맑고 청아한 염불소리는 귓전을 씻어 심연으로 깊이 흘러든다. 사찰의 왼쪽 개울을 따라 가면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부도전이 있다. 주로 석종형의 부도인데 사찰의 규모에 비해 부도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보면 연혁이 깊은 고찰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마침 동곡 장날이라 오는 길에 들러 좌판에 펼쳐놓은 갖가지 푸성귀도 사고 정물화 소재로 쓰려고 향기 듬뿍 머금은 모과도 한 바구니 샀다. 시장의 인심은 요즘도 지폐 한 장이면 간 갈치 한 다발이 묵직하다.
나의 그림 중에는 추수를 끝낸 한가로운 들판이나 농가, 산 그림자를 드리운 강가 등, 고향의 풍경이 많다. 중학교만 마치고 곧장 도시로 나온 동생들과 달리 부모의 슬하에 오래 머물렀기에 고향에 대한 애정이 더 깊은지 모르겠다. 어느 계절인들 정겹지 않을까마는 만사가 풍요롭고 서정이 스민 고향의 가을이 유난히 정겹다. 어릴 적부터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의 감성을 키워준 모태와도 같은 고향산천은 언제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대구수채화협회이사, 앤갤러리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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