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40리 천년고찰 소풍길 배꼽 잡는 장기자랑 눈에 생생
누구나 '고향' 하는 말만 들으면 금세 눈시울에 물기가 서려오리라. 그러면서 아득히 하늘 저편의 그리운 얼굴들을 주르륵 떠올릴 것도 같다. 그것은 고향이라는 낱말이 우리 삶의 어머니 같은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터이다, 특히나 시골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분들이라면.
나 역시도 산 좋고 물 맑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을 고향으로 두었기에 마흔 해 가까이 오매불망 그리워했고, 그것은 세월이 갈수록 깊어지는 고질병이 되었다. 한편으로 그런 고향을 간직하고 있음에 늘 감사하며 살아왔다.
폐교된 초등학교 자리에 '고령군향토문화학교'가 들어서서 지산리 고분군과 대가야박물관, 왕릉전시장, 우륵기념관 등과 연계하여 지역민들의 문화지킴이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곳, 고령군 쌍림면 월막(月幕) 마을이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 잔뼈가 굵은 고향이다. 임진왜란 이후 400여 년을 현풍 곽씨들이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온 곳이다. 일문삼강(一門三綱), 곧 한 집안에 충신, 효자, 열녀가 나왔으며 청백 세가라는 자부심이 시퍼런 마을이다.
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월막'이라는 지명은 달이 장막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실제로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날 휘영청 보름달이 떠오르면 마을을 두르고 있는 첩첩한 산들이 마치 장막을 둘러친 것 같은 아늑한 풍광을 연출하곤 한다.
조선의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 선생은 늙은이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가까운 일은 깜빡깜빡하는데 먼일은 낱낱이 기억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그것도 나이라고, 오십 줄을 넘어서면서 엊그제 일들은 금방금방 잊어 버리는데 어린 날의 일들은 날이 갈수록 또렷해져 온다.
고향을 생각할 때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의 대다수가 초등학생 시절과 중학생 때의 기억들이다.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은 섬처럼 아련하고 중학교 때의 기억은 첫사랑의 연인같이 애틋하다.
이런저런 일들 가운데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세배에의 추억이다. 설날 아침이면 꼭두새벽에 일어나 설빔을 차려입고 발갛게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세배를 다녔다. 종손어른을 먼저 찾아뵌 다음 집집이 돌아다니며 세배하고 세뱃돈 받는 것이 명절날의 큰 즐거움이었다. 꽁꽁 묶어서 허리춤에 차고 계시던 쌈지를 풀어 꼬깃꼬깃 접힌 십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쥐여주시던 그 손길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가 않는다.
일 년에 봄, 가을철로 갔었던 소풍의 정경도 기억의 서랍에 고이 개켜져 있다. 그때의 소풍지들은 대개가 절집 아니면 고택이었다.
쌍림중학교 일 학년이었을 때 미숭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천년고찰 반용사(盤龍寺)로 소풍 갔던 일이 녹화된 필름처럼 생생히 재생되어 온다. 학교에서 목적지인 반용사까지 장장 왕복 사십 리 길을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돌아왔으니 채 덜 여문 다리가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요새 아이들 같았으면 사람 죽는다고 난리가 났었을 일이다.
그날 부모님에게 삼십 원을 용돈으로 받아 가서는 십 원어치를 사먹고 이십 원을 남겨왔었다. 그만큼 내남없이 그때 아이들은 돈 귀하고 소중한 줄을 알았었다. 주면 주는 것이 한정인 요새 아이들이 들으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다며 비웃음을 날리고도 셀 일이다.
그날의 하이라이트였던 장기자랑 시간,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의 일본말) 없으면 마시지 못하고…." 권수라는 아이가 덩실덩실 학춤을 추면서 만담을 할 때 아이들은 하나같이 너무 우스워 배꼽을 쥐고 데굴데굴 굴렀었다. 그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 고향 쌍림이 크게 자부심을 가질 만한 곳을 한 군데 들라면, 나는 주저 없이 개실마을을 꼽고 싶다. 이 마을은 조선조 성종 때의 이름난 문신이었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유서 깊은 곳이다. 점필재 선생은 형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성리학적 개혁정치에 앞장선 사림파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모든 개혁 세력의 운명이 그러하듯 선생도 반대파의 모함에 의해 일어난 무오사화로 당시로서는 가장 치욕스럽다고 여기던 부관참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로부터 350여 년이 흐른 지금, 개실마을은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 사업'을 통해 도시민에게는 건전한 여가 선용과 농촌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민에게는 소득 증대와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한편 전통문화를 후세에 물려주기 위한 운동을 펼쳐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엿, 유과, 떡, 두부 만들기 등은 개실마을이 자랑하는 체험학습의 항목들이다.
고향을 생각하면 결코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 그때가 초등학교 졸업 직후였었다. 졸업의 해방감에 들떠 늘 꿈같이 아득하게만 보이던 미숭산(美崇山)을 찾아 나섰다. 미숭산은 고려 말 이미숭 장군이 군사를 모아 성을 쌓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대항하여 고려를 회복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한 곳이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너무 어렸던 탓에 그저 이름 정도만 듣고 있었다. 해발 757m나 되는, 고향 마을에서 북쪽으로 십 리가량 떨어져 있는 그 산을 오르는 것은 아직 초등학생으로서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올랐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생각나는 것이 없다. 다만 이미숭 장군이 이성계의 군사에 맞서 최후의 일전을 벌인 산 정상부의 성 안에서 우리 개구쟁이들이 '고생박기' 놀이로 하루해를 즐겼었다는 기억만은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다. 지금도 어린 날의 그 치기를 떠올리면 한편으론 부끄럽고 한편으론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마흔 해 가까운 세월이 흘러 다시 올랐을 때, 성은 죄 허물어지고 흔적만이 희미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었다. 미숭산의 원래 이름은 상원산이었다. 그러던 것이 장군의 충절이 서린 곳이라 하여 훗날 미숭산으로 바뀐 것이다. 사람은 떠나도 자취는 남는 것, 장군은 가고 없어도 미숭산이라는 이름은 세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길이길이 불리리라.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한 속담처럼 누군들 고향 자랑에 침이 마르지 않을 이 있을까. 남들에게는 대수롭잖은 것일지라도 고향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일쑤 눈이 먼다.
내 고향 역시 그러고 보면 참 자랑거리가 많은 고장이다. 지난날의 자랑거리가 예의 미숭산과 반용사, 점필재 고택 등이라면 오늘날의 자랑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딸기다. 딸기 하면 쌍림이고 쌍림 하면 딸기다. 그만큼 딸기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대구 경북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그 명성이 높다. 88고속도로 고령인터체인지를 벗어나 합천군 율곡 가는 길로 접어들면 안림마을이 나온다. 멀리서 보면 이곳 들판 전체가 하얗게 눈이 내렸나 싶은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그것은 눈이 아니라 거대한 비닐하우스 촌이다. 비닐하우스들이 온 들을 뒤덮고 있다. 바깥은 펑펑 눈이 쏟아지는 한겨울 철에도 비닐하우스 안은 새빨간 딸기가 계절을 앞서 달리고 있다. 이 딸기가 고향 사람들의 주요 겨울 소득원이 되어준다. 딸기 덕분에 쌍림 주민들은 다른 여느 농촌 지역에 비해 생활 정도가 넉넉한 편이다.
무릇 만상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그 무엇이 있으랴. 고향의 모습도 세월 따라 몰라보게 변하고 인심도 예전 같지가 않다. 하지만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고 바뀌는 것이 세상사 아닌가. 다만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리지만 않고 고이 간직하면 되는 것을. 마음의 고향을 간직한다는 것은 천금의 재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재산이 되리니….
곽흥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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