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전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등장한 울릉도·독도

입력 2011-11-14 08:50:16

300여 년 전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독도 문제가 등장한 사실이 대구변호사회 독도특별위원회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일본이 독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며 영토 침탈의 야욕을 한층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번에 발견된 300여 년 전 과거시험 문제가 담긴 문건이 일본의 주장을 뒤엎을만한 중요한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대구변호사회 독도특별위원회는 14일 조선시대 숙종이 1693년 발생한'안용복 사건'(울릉도 쟁계)과 관련해 과거시험에 문제로 출제해 대책을 구하게 했음을 밝혀준 문서를 처음 발견해 공개했다.

A4 사이즈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이 문서는 시험문제 1장 반, 답안지 12장 반으로 총 14장으로 이뤄져 있다.

이 문서는 독도특별위원회 소속 방문일(48) 변호사가 발견했다. (사)국학연구소 대구경북지부 고문변호사를 맡고 있는 방 변호사는 올 초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2만여 점의 각종 고문서의 분류 작업을 하던 중 이를 발견했다. 이 문건은 방 변호사가 한아문화연구소 유미림 박사에게 해석을 의뢰해 조선시대 숙종 시절인 1696년 당시 치러진 '문과전시(文科殿試)'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유 박사는 "경상북도 의성지역의 선비였던 신덕함(申德函·1656~1730)의 문집 안에 실려 있는 이 사료는 '울릉도 쟁계'로 인한 대일(對日) 대처 방안을 모색하고자 숙종이 조정 대신들의 의견을 제시해주고(책문·策問), 이에 대해 과거 응시자들의 의견을 구하는(대책·對策) 형식으로 돼있는 전형적인 과거시험 문제"라며, "특히 '울릉도 쟁계' 관련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사서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과거시험에도 이 문제가 등장한 것은 당시에도 울릉도·독도가 한일 관계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국가대사였는지 엿볼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또 이 사료에는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王若曰)'로 시작해 '신은 대답합니다(臣對)'로 끝을 맺는 등 숙종이 직접 출제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유 박사는 설명했다. 그는 "보통 왕이 내는 책문은 국가경영의 방도로써 개혁의 방책 또는 현안문제를 묻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 문건을 통해 숙종 연간의 전시에 '울릉도 쟁계'가 시제로 나왔다는 사실은 당시 숙종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일본의 침탈 의도를 간파했음은 물론이고, 울릉도·독도 침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유 박사는 이 사료와 관련된 논문을 '독도연구소 영토해양연구'라는 저널에 소개할 예정이다.

대구변호사회 독도특별위원회 방문일 변호사는"이 사료를 통해 예전부터 우리나라는 울릉도의 범주 안에 독도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준다"며 "앞으로도 이 사료와 연관된 사료 발굴을 통해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을 봉쇄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시험문제

임금은 이렇게 말하노라. 울릉도가 멀리 동해(東海)에 있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강원도에 속해 있다. 우리나라 땅이라고는 하나 수로가 멀고 험해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아(人煙不通), 조종조에 섬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와(刷還洲民) 그곳을 비게 하였다(遂虛其地). 요사이 일본인이 대나무와 전복, 물고기 등의 이익을 탐해 竹島라 가칭하고 그 땅에서 우리 백성들이 경계를 넘어가 어채하는 것을 금해줄 것을 청했다. 근시(近侍)를 자주 파견하여 죽울(竹鬱)의 허실과 경계에 구분 있음을 효유(曉諭)했으나 끝내 들을 생각이 없어 자못 불화(生梗)의 단서가 있다.

내가 이를 염려하여 널리 조정의 의견을 물으니, 혹자는 말하기를, "조종의 강토는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인데, 한번 그들의 소유가 되면 동쪽 경계를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바람을 타고 출몰하면 실정을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변방의 장수(邊帥)를 가려 보내 우선 점거해 지키는(據守) 것이 낫습니다"고 하였고, 혹자는 말하기를, "바다 밖 조그만 섬은 본래 빈 땅인데 (일본과의) 백년간의 인호(隣好)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이로 인해 흔단을 만드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니, 그들의 왕래를 내버려두고 변방의 방비(邊備)를 수칙(修勅)하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설 중 어느 쪽이 나은가? 아니면 이 외에 따로 만전(萬全)의 양책(良策)이 있는가? 자대부(子大夫)들은 독서하고 담도(談道)하는 여가에 반드시 '변방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킬 방도(安邊靖國之猷)'를 강구하여 각자 자세히 대책에 나타내도록 하라.

※울릉도 쟁계=1693년 봄 울산과 동래 어부 40여 명이 울릉도에서 어로작업을 하다 일본 어부와 만나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일본 어부들은 안용복과 박어둔을 납치한 뒤 그해 11월 초 '조선 어민의 울릉도 출어 금지'를 요청하는 서계와 함께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조선과 일본은 울릉도의 어업권과 영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울릉도 쟁계)이 벌어졌다. 분쟁 결과, 일본 막부는 울릉도를 조선의 땅으로 인정하고 '죽도(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으며, 당시 일본 막부는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를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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