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합의로 3일 국회 본회의가 전격 취소되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둘러싼 여야 대치가 장기화될 전망이다. 다음 본회의는 10일과 24일로 예정돼 있지만 처리가 다음달로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4일 오전 각각 주요 당직자회의와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한미 FTA 처리 관련 대책을 논의했다. 한나라당 황우여 원대대표는 이 자리에서 "민주당이 국회 내에서 전혀 논의하지 않고 대화의 장도 제대로 열지 않은 채 야권 통합 논의에만 몰두하다가 거리로 뛰쳐나가기로 했다고 한다"며 "이를 국민들이 어찌 볼지 걱정된다"고 비판했다.
이주영 정책위의장은 "민주당은 자신들이 여당일 때는 까막눈이어서 잘 몰라서 추진했다고 하는데 들여다보면 야권 통합에만 매몰돼 국익을 팽개치고 있는 것"이라며 "까막눈이었다는 주장은 위장일 뿐이며 무뇌상태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국회는 이날 상임위별로 소관 부처'기관에 대한 내년도 예산안 등을 심사했다. 그러나 비준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의 극명한 입장 차이로 외교통상통일위는 전체회의 일정 자체가 잡히지 않았다. 민주당과 민노당은 외통위 회의장 점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정동영 최고위원은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지하철역 앞에서 'ISD 절대반대'라고 적힌 어깨띠를 메고 출근길 시민들을 상대로 거리 선전전을 펼쳤다.
앞서 3일 오후 열릴 예정이었던 본회의는 회의 시작 10분 전에 취소됐다. 박희태 국회 의장의 "안건도 몇 건 없고 FTA로 여야 간 긴장감이 고조되는데 굳이 본회의를 열 필요가 있겠느냐"는 제안을 여야가 수용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확인된 상황에서 물리적 충돌 속에 비준안이 처리될 경우 여야 모두 여론의 거센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회 계류 중인 민생법안이 수천건에 이르는 상황에서 여야가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FTA 때문에 당초 예정됐던 본회의조차 열지않은 것은 직무유기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또 'FTA 대치'가 결국 정략적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한 판단에 따른 것이란 비난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한나라당의 경우 야당의 물리적 저지를 부각시켜 비판 여론을 확산시키고 강행처리에 대한 명분도 쌓는다는 게 속셈이라는 관측이다. 반면 민주당은 '우리를 밟고 가라'는 식으로 대응함으로써 한나라당의 악수(惡手)를 유도한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이와 관련, 이용섭 민주당 대변인은 4일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민주당이 물리적으로 저지하면 국민들이 비판도 하고 따가운 시선을 보낸다는 걸 잘 알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반면 한나라당 구상찬 의원은 "민주당은 민노당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는 정당과 마찬가지"라며 "지금 선동하는 의원들 중에서는 따로 만나면 '왜 고생하면서 이러느냐, 빨리 통과시켜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여권에선 파행이 계속될 경우 박희태 국회의장의 본회의 직권상정 수순을 밟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박 의장이 직권상정을 수용하면 한나라당은 다음 본회의에서 강행 처리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김세연 의원 등 '국회 바로세우기 모임' 소속 의원들이 이날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강행 처리에 반대, 비준안 처리가 아예 연말로 넘어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본회의 무산 후 비공개로 진행된 의원총회에선 '속전속결' 주장이 다소 많았지만 '합리적 처리' 의견도 적지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어떻게든 물리적 충돌을 피해서 FTA를 처리하자는 게 여권 지도부의 생각"이라며 "장기전으로 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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