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서민스러움, 그 화려한 외피

입력 2011-11-03 10:57:19

'서민스러움'은 선거에서 당선의 키워드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은 현실에서 서민으로 비치지 않으면 당선되기 어렵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 모두 똑같이 1표를 행사하는 보통선거가 낳은 현상이다. 뒤축이 터진 구두가 인터넷과 신문 지면을 장식했던 박원순 후보가 연회비 1억 원의 호화 피부관리실을 다녔다는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이긴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이 '서민스러움'의 위력을 잘 보여줬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이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서민의 풍모를 보이려고 노력했던 사실에서도 서민스러움이 갖는 정치적 이득은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서민의 지지를 받아 당선된 '서민스러운 사람'들은 과연 진짜 서민일까. 독일의 정치학자 로버트 미헬스의 정당 연구는 이런 기대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전형적인 노동계급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지도자와 평당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고 있더라는 거다. 정당의 지도자와 대의원들이 노동계급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 그들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쁘띠부르주아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들이 일단 그런 권력의 자리에 도달하기만 하면 (노동자와) 달라질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 정당은 노동계급과 뚜렷이 구별되는 '탈노동자화'된 엘리트가 지배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말하자면 붕어빵에 붕어 없듯이 서민 정당에 서민은 없더라는 것이다.

거창한 발견인 듯하지만 진부한 얘기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올린 좌파 인물들의 이면을 보면 전혀 서민스럽지 않았다. 노동자 해방을 외치면서도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평생 떨치지 않았고 현실이 허락만 하면 기꺼이 부르주아적 취향과 삶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지금 이곳에서 '서민 담론'을 열심히 생산해 내는 명망가들의 모습도 그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박 시장은 뒤축이 터진 구두를 신었지만 대한민국 1%만 산다는 서울 강남에서, 그것도 60평짜리 아파트에 산다. 월세(250만 원)라지만 '진짜' 서민은 엄두도 못 낼 고액을 낸다.(이 때문에 그의 구두는 고도의 연출이라는 고약한 의심도 든다) 포스코 등 여러 기업의 사외이사로 있으며 고액 급여도 받았다.(모두 기부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긴 하다). 그가 당선되는 데 두 번씩이나 결정적 '협찬'을 한 안철수 씨의 재산은 드러난 것만 1천300억 원이 넘는다. 의사 아버지를 둔 덕분에 크면서 고생도 안 했다. 박 시장과 절친한 조국 서울대 교수는 자식 대학 등록금이나 할부금 고지서에 골치를 썩히지 않아도 되는 '강남 좌파'다. 그 외 이들 주변의 명망가 역시 굳이 서민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진짜 서민은 분명 아닌 듯하다.

이들의 서민스럽지 않은 모습이 배 아파서 하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뭔가 속은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들이 이번 재'보선에서 쏟아낸 '서민 담론'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같은 불편한 마음은 결국 그들의 서민 담론은 먹고살기 어려워 울고 싶은 서민의 뺨을 때려준 선거공학이 아니었을까라는 불건전한(?) 의심으로까지 이어진다. 너무 냉소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만 이제 서민들은 정치가들의 '서민스러움'의 본질과 의도를 고민해 볼 때가 됐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해방되고 좌우 갈리 싸울 때 나도 좀 뿔또그레(불그레)해가주고 전농(全農)이다 민청(民靑)이다 기웃거려 본 적이 있제… 그런데 내가 왜 그 짓을 치앗뿐지(치워버린 줄) 아나? 그 길을 쪼매 알아보이 그 꼭대기에 또 너 아부지 동영 씨가 안 있나? 우리 같은 없는 사람들 세상 만들라꼬 하는 운동인 줄 알았는데 거다가도(거기도) 대가리는 모도 배운 사람들이라. 다사(모두야) 아니지만 배운 사람이 곧 있는 집 자슥이고-그걸 보이 말캉 헛거지 싶드라. 백성에서 인민(人民) 된다꼬 뭔 큰 수 날 거 같지도 않고 힘 있고 똑똑은(똑똑한) 사람한테 동무라 부른다꼬 참말로 동무 될 것 같지도 않더라… 그래 치앗뿌랫제." 이문열의 '변경'에서 진규 아버지가 도련님으로 모셨던 혁명가 동영 씨의 아들(철)에게 한 말이다. 박 시장과 그 주변 인물을 보면서 문득 이 구절이 생각났다.

鄭敬勳/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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