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우중충해 외출은 포기한 일요일, 가을 단풍은 어디가 아름다운지 눈 호강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인터넷 블로그들을 기웃거리는데 재미있는 사진이 눈에 띈다. 일곱 자리 숫자가 선명하게 찍힌 백화점 영수증 사진이다. 새로 산 명품 지갑을 자랑하기 위해 누군가가 올린 글인데 유명 백화점에서 진짜로 비싸게 산 물건임을 입증하는 용도로 영수증이 등장하고 있다. 요즘 세상 사진이 중요한 건 알지만 별 황당한 걸 찍는다는 생각도 잠시, 여기저기 비슷한 사진들이 넘쳐난다는 걸 이내 발견했다. 너 명품 샀냐고 딱히 궁금해 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다들 영수증과 브랜드 이름이 선명한 포장 상자까지 내보이며 내 말이 참말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퍽이나 큰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카메라 폰과 소셜 미디어가 생활의 일부가 되면서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들은 이른바 인증샷으로 넘쳐난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남다른 장소를 가도, 신기한 물건을 보아도 사진은 필수다. 사진 한 장 없이 무슨 주장을 하거나 자랑을 하면 당장 인증샷을 내놔 보라는 야유 섞인 주문을 받게 된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정보를 신뢰하는 것이 힘들다 보니 사진을 증거 삼아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려는 사회적 관행이 새롭게 형성 되어 가는 모양이다.
굳이 증거 사진까지 제시하며 소소한 나의 일상을 내보이려는 심리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고 또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 때문일 것이다. 인정 욕구의 충족 정도에 따라 일상생활에서 맛보는 고통과 행복의 상당 부분이 영향 받는다. 어찌보면 인간의 행동은 인정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일부 학자들은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투쟁까지도 그 근본적 목적은 자신들의 명분에 대한 사회적 정당성을 인정받는 데 있다고 이야기 한다. 새로 나온 라면을 먹어봤다는 등 깨알 같은 자랑거리라도 드러내려는 인증샷 문화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누군가로부터의 인정 획득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입시나 취업, 직장에서의 생존 등 삶은 온통 치열한 경쟁 일색이다. 살아남아야 하고 이겨야 한다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다 보면 뭘 해도 더 잘해야 하고 남달라야 한다. 그리고 남들 못지않게 잘하고 있다는 것을 비교하고 확인해야 한다. 요즘 흔히 듣는 '부러우면 지는 거야'는 인정받기 위한 경쟁에서 패배감을 느낄 때의 씁쓸함과 자기 위로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최근 아이돌 그룹의 노랫말은 한걸음 더 나가 내가 최고라고 일방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모든 것 하나 하나 핫 이슈" "내가 제일 잘나가" 라는 외침은 남의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나는 승자라고 주장함으로써 경쟁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사전 차단하고자 한다.
과도한 자랑질의 사회적 확산은 아닌지 걱정하게 하던 인증샷 문화가 사회를 바꾸는 긍정적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징후를 보여줘 설레고 흥분된다. 지난달 26일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 투표하고 인증샷을 올린 젊은이들이 제법 많다는 소식이다. 보궐 선거 당일 트위터에 올라온 인증샷이 2만7천 건에 달한다고 한다. 투표에 참여한 연예인들이 인증샷을 올려 투표소에 나오기를 독려한 것이 일조했겠지만, 근래에 보기 드문 젊은이들의 정치관심인 것은 분명하다. 생활 구석구석에서 재미난 놀이로 정착한 인증샷이 선거와 만나니 결과적으로는 투표참여라는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 것을 보며 인터넷, 스마트폰 등 신기술이 시민사회 활성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기대가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안도감이 든다. 투표용지를 찍어서 올렸다가 고발당하는 등 약간의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마트폰을 이용한 정치비판 팟 캐스팅 등에 보여주는 젊은이들의 관심과 병행해 정치의 생활화가 가능한 것은 아닌가 하는 성급한 희망도 가지게 한다. 아직은 작은 출발에 불과하지만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그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어우러져 방향을 잘 잡게 된다면 투표뿐 아니라 각종 봉사, 사회감시 등 사회발전을 위한 긍정적 에너지의 자가발전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면 더 좋겠지만 '보여주기 정서'가 대세인 만큼 숨기기의 미덕을 연륜으로 깨칠 때까지 인증샷의 잠재력을 실현하는데 관심을 쏟아보자.
양정혜/계명대 교수·광고홍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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