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최중근의 세상 내시경] 지식인의 덕목

입력 2011-10-20 14:00:50

최근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분노하라'(Indignez-vous)를 꼽겠다.

얇지만 가장 뜨거운 메시지를 담은 책이었다. 본문이 불과 36쪽밖에 되지 않는 이 책은 지난해 프랑스에서 발간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몇 달 전에는 한글로도 번역돼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책의 저자인 94세 노장 스테판 에세는 프랑스 젊은이들, 아니 세계 젊은이들을 향해 분노하라고 외치고 있다.

나치에 항거해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사형선고까지 받을 정도로 치열한 삶을 불태웠던 노장의 눈에는 현대사회 젊은이들의 모습이 지독히 모순이고 좌절이었을 것이다. 약자에 대한 차별은 갈수록 심화되고, 빈부격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으며, 대량 소비와 물질 만능에 익숙해져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와, 그리고 그 사회에 대해 전혀 분노하지 않는 이들을 향한 외침이다.

에세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바는 '앙가주망'일 것이다. 가장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역설한 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자진해서 적극 참여하는 일을 가리키는 앙가주망(engagement)은 현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에게는 사명처럼 다가온다.

앙가주망보다 앞서 유럽 사회를 떠받쳐 온 덕목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ilge)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보았다.

호사스러운 생활과 특권을 누렸던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언제든 재산을 내놓고 가장 먼저 전장으로 달려나갔고, 기꺼이 목숨을 바쳐 명예롭게 전사함으로써 특권에 버금가는 희생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 지도층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아직은 요원한 명제임에 틀림없다. 국가의 대표적인 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장관들과 총리의 인사 청문회가 열릴 즈음이면 더욱 실감이 든다. 미심쩍은 사유로 군대를 안 갔거나, 전관예우 대접을 받으며 1년에 몇 십억원대의 돈을 벌었다든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불법 위장전입을 했다고 사죄하거나, 부득이한 사유로 부동산 투기를 했다며 고백하거나 대개 이런 케이스에 하나쯤은 걸린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만석꾼으로 불리는 경주 최부잣집이다.

'재산은 만 석 이상 모으지 마라,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벼슬을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시집 올 때 은비녀 이상의 패물을 갖고 오지 마라,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그 유명한 최부잣집의 가훈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앙가주망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늘어만 가는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OECD 최고의 자살률과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되는 나라, 살인적인 물가, 불안한 사회안전망, 이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무엇이며, 참여를 통해 바꾸어야 할 부조리는 무엇인가. 희생과 베풂이 필요한 곳은 또 어디인가.

분명한 것은 소외된 이웃과 힘없는 약자들을 위해 나의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며, 가진 지식과 혜안을 쏟아부어 사회적 이슈에 관해 고민하고 때론 한목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가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만 석 이상 모으지 말고 과감히 버려야 할 때 버릴 줄 아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굶어 죽는 사람을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아는 '앙가주망'이다.

(구미 탑정형외과연합의원 원장)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