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 연연않고 민족의 앞날 걱정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초토화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비참했다. 이런 와중에 병조판서로, 재상(宰相)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사람이 바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 선생이다. 황희, 맹사성, 채제공과 함께 조선조 4대 명재상으로 불린다.
본관이 풍산으로 1542년(중종 37) 어머니의 친정인 의성의 사촌마을에서 태어났다. 21세 되던 해 형 운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었다.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오는 등 승진을 거듭하며 사가독서에 뽑혔다.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자 이를 크게 우려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해 학문에 전념했다. 다시 형조판서로 복직되었다가 임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이조판서 겸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이때 장차 왜구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전라도 좌수사로, 형조정랑이었던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했다.
1592년(선조 25) 4월 드디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급한 선조는 병조판서 겸 영의정으로 임명하여 병권과 국정을 맡기려고 하였으나 반대파의 모함으로 임명 하루 만에 취소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러나 선조는 경세와 전략을 겸비한 인물로 선생보다 나은 사람이 없음을 알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시켰다. 선생은 전시 행정을 총괄하면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한편 지역 사정에 밝은 의병을 투입해 왜(倭)를 막고, 백성을 구제하는 등 민심 수습에 전력을 투구했다. 그러나 또다시 파당의 배척으로 권력에서 밀려나고 그 사이 이순신은 파면되고 원균이 통제사가 되어 해전을 펼쳤으나 패하면서 곡창지대인 호남마저 왜에 유린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1598년(선조 31) 반대파인 북인(北人)들은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지원군 정응태의 무고에 대해 명나라에 가서 직접 해명하지 않는다고 탄핵하여 모든 관직을 삭탈시켰다. 온몸으로 국난극복에 앞장섰던 선생으로서는 억울함이 뼈에 사무쳤을 것이나 더 이상 벼슬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물러나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에서 저술과 독서, 후학양성으로 소일하며 임란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가 담긴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을 펴냈다. 그 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봉되었으며 1607년(선조 40) 마침내 66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하회마을에는 특이하게도 수식목이 4곳에 있다. 한 곳은 마을 한복판 삼신당의 한 곳인 하당에 입향조 류종혜(柳從惠)가 심은 수령 600여 년의 느티나무이고, 다음은 형 운룡(1539~1601)이 부용대가 누르는 기를 막기 위해 조성한 만송정(천연기념물 제473호), 그리고 서애가 만년에 옥연정사 부근에 심은 소나무, 13대 종부 무안 박씨가 심은 충효당 만지송이 그것이다.
선생은 머리글에서 '어찌하여 나이 사십이 되어 몇 그루 어린 소나무를 심는가 인생 칠십은 예부터 드물다는데 언제 나무가 자라 그늘을 볼 것인지'하였다는 당나라 시인 백낙천의 '소나무를 심고'라는 시를 보고 자제들과 함께 심었다고 밝히고 있다. 시문은 다음과 같다.
북쪽 산 아래 흙을 파서 서쪽 바위 모퉁이에 소나무를 심었네.
흙은 삼태기에 차지 않고 나무 크기 한 자가 되지 않네.
흔들어 돌 틈에 옮겼으니 뿌리도 마디마디 상했으리라
땅은 높아 시원하여도 가꾸기엔 물이 적은 듯한데.
비, 이슬 젖기엔 더디면서 서리 바람 맞기엔 빠르겠구나.
늙은이 일 좋아 억지 부려 보는 이 속으로 어리석다 웃을 테지
어찌하여 늙은이 나이 들어 자라기 힘든 솔을 심었을까.
나 비록 그늘 보지 못해도 뉘라서 흙 옮겨 심은 뜻 알겠지
천 년 지나 하늘 높이 솟으면 봉황의 보금자리 되리라.
척박한 토양과 좋지 못한 환경에 그것도 성장이 더딘 어린 소나무를 고희를 바라보는 63세에 심고 천 년 후 봉황의 보금자리가 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봉황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있었으니 학문과 덕행으로 세월이 지날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학문연마와 인격도야에 힘썼던 하회마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징비록'과 '서애집' 등이 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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